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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호 1년][실종자 가족인터뷰 2 - 박은미, 허흥환씨]“대학생 언니, 동생 학교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다 돌아와”
[헤럴드경제=이지웅ㆍ김진원 기자] 박은미(46ㆍ여)씨와 허흥환(52)씨 부부는 딸이 둘이다.

큰딸은 대학생(21)이고 막내딸은 365일째 물에 갇혀 있는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18)양이다.

두 딸의 아빠 허씨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23년간 일하다가 딸을 잃어버린 1년 전 4월 16일 직장을 휴직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회사에서 쫓겨났다. 엄마 박씨는 희귀병인 신경섬유종이 있다. 커진 종양이 신경을 눌러 사고 이후 오른쪽 청력을 잃었다. 몸이 안 좋은 박씨는 영상 17도가 넘는데도 겨울 패딩으로 몸을 꽁꽁 싸맨다. 그리고 매일 안산, 광화문을 오가며 길에서 피켓을 든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놓인 세월호 실종자 9명의 사진. 단원고 2학년 조은화 허다윤양, 남현철 박영인군, 단원고 양승진 고창석 선생님, 일반인 권재근씨, 아들 혁규군, 이영숙씨는 아직 물속에 갇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엄마, 아빠는 사고 전날 밤 애교 많던 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수학여행을 죽어도 안 간다고 했어요. 밖에서는 성격이 소심해서. 이번 기회에 친구도 많이 사귀고 스트레스도 풀라고 달래서 보냈는데, 애가 뭐를 알았던 것 같아요. 전날 밤 아빠가 좋아하는 물건 달라고 해서 그거 갖고 가고, 생전 용돈 얘기 안 하던 애가 용돈도 달라고 하고. 다 해서 6만원 들고 갔는데, 그날 가면서 애들이랑 뭘 사먹었나봐. 3000원 사먹고 7000원이 남았어. 그게 유품으로 나왔거든요. 5만원 한 장이랑 7000원. 그런 거 말고 애가 나와야 되는데.”(허흥환)

엄마 박씨는 패딩 안에 평소 딸이 좋아했던 색깔인 민트색 니트를 입고 있다. 딸은 신발도, 옷도, 아이스크림도 온통 민트였다. 엄마의 민트색 니트도 다윤이가 좋아하는 색 입고 다니라고 누군가 떠서 준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실종 학생 단원고 2학년 허다윤양의 엄마 박은미씨, 아빠 허흥환씨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딸의 사진을 보고 있다.

“딸도 몸이 아파서 그랬는지 철이 빨리 들었어. 엄마, 아빠 외에는 없었어요. 학교 도착하면 도착했다고 문자 오지, 출발하면 출발한다고 오지. 엄마, 아빠 누워 있으면 와서 껴안아주고.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애가 인터넷에서 마사지 같은 걸 배웠어요. 나는 내 몸이 힘드니까 치대는 거 귀찮아했어. 그런데도 그렇게 하더라고. 우리가 딸한테 준 사랑보다 딸이 우리한테 준 사랑이 너무 커서.”(박은미)

동생 없는 시간을 언니도 간신히 버티고 있다.

“다윤이 언니는 학교 갔다가 저녁 5시 30분에 집에 와요. 알바하다가 밤 12시 돼야 다시 오고. 같이 밥 먹은 게 언젠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전혀 내색을 안 하는데 가끔 애가 사라지거든요. 동생 학교가 집에서 20분 거리인데 다윤이 반에서 다윤이만 실종 상태거든요. 그래서 다윤이 책상만 뒤로 빼놨어. 언니가 거기 엎드려서 풀릴 때까지 엉엉 울다가 돌아오는 거야….”(허흥환)

엄마 박씨는 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염치가 없다고 했다. 대신 “엄마 딸이어서 너무 고마웠고, 수학여행 가기 싫다는데 보내서 미안하고, 아직도 찾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내가 다윤이 엄마라는 게 미안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더한 부모도 많죠. 유가족 중에는 외아들, 외동딸도 많더라고.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반도 안 되고. 그래도 찾아는 줘야지. 이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안을 수도 없지만 인양해서 한 번 안아주고 싶고 그거 외에 뭐가 더 필요하겠어요. 함께 갔는데 함께 곁으로 보내는 줘야지. 따로 놓을 수는 없잖아.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부모로서 마지막 할 일이다.”(허흥환)

실종자 가족들의 첫 번째 바람은 세월호를 인양하는 것이다. 유가족도 될 수 없는 실종자 가족들이 납덩이 같은 죄책감을 떠안은 채 1년을 맞고 있다.

plato@heraldcorp.com



-인터뷰 전문



#박은미씨(허다윤양 어머니)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 딸 찾아 달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참사 이전과 이후 생활을 보면. 이런 일은 정말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건데. 제가 알기로는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없죠. 어떻게 자식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딨는지도 아는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책임지고 찾아주고 이래야 되는 데도 불구하고. 지금 1년이 다 돼도 학교에 간 수학여행 간 내 딸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떻게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 나에게 닥쳤다는 그 생각이 너무 그렇고.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무조건 찾아야 된다는 것. 내 딸. 실종자 무조건 찾아야 되는데 그런 반응이 없는 게. 우리가 이렇게 찾아 주세요. 안 해도 대한민국 국민이니 정부가 책임지고 해야할 일 앞에 아무것도 안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체육관에 있을 때 다윤이 아빠한테 이야기 했어요. 수색 종료 하면 내딸 찾아 달라고 피켓시위 하겠다고 올라왔어요. 올라올 때 내 딸 데리고 올라오지 못했다는 것에 한 달 동안 집 나가지도 않고 방에 누워있었다고요. 그러면서 정부에 이렇게 동태를 보니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거에요. 이건 아니다. 나는 그냥 내딸. 그때 보니까 정부가 움직이지도 않지만 돌아가는 상황 보니 여론을 움직이게 해야 되겠더라고요. 여론 정말 중요한데, 난 일단 내딸 찾겠다는 그 하나 가지고 피켓 들고 나가자 이래가지고 우리가 손수 글씨 쓰고 사진 준비하고 청운동에 올라갔어요. 실종자 가족들. 그냥 어이없어요. 사실. 어이없고 자식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딸을 찾으라고 피켓을 들고 이렇게. 찾을 수만 있다면 이딴 거 더 할 거거든요. 다윤이만 찾을 수 있다면 내 생명을 달라고 해도 그것도 살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찾아달라는 거죠. 살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찾아 달라는 건데 그것조차도 움직이지 않는 나라가 정말 원망스러워요. 그냥 제가 바라는 것은 지금은 그래요.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긴 했는데 일단 딸을 찾아야지 마무리를 져 줘야지 우리도 살수 있지. 지금은 사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어요.

사실 몸은 지금 많이 안 좋아요. 그런데 딸을 찾는 데는 그것도 문제가 안 돼요. 왜냐면 종일 생각 나는 게 세월호 안에 있는 다윤이가 생각이 나기 때문에 거기서 얼른 애를 찾아서 마무리를 져줘야 다른 생각을 저도 할 수 있지.

우리 셋은 주로 교회 갔다 오면, 다윤이 언니가 있는데 언니는 친구들하고 노느라 바쁘고 다윤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성격이 바뀌면서 활달했던 애가 약간 내성적으로 바뀌었어요. 집에서 주로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들 노래 따라 부르고 주일날 교회 갔다와서 집에서 쉬다가 우리가 오면 같이 언니는 친구랑 놀고 셋이서 주로 바깥에 나가서 다윤이가 좋아하는 삼겹살 치킨 이런거 먹으로 가고. 다윤아 먹으러 가자 하면 먹고 다윤이는 저를 친구처럼 여기면서도 아빠를 좋아했어요. 아빠 퇴근하는 시간 되면 아빠 뭐 먹고 싶어. 사달라고 하고 자기 필요한거 아빠 꼬셔서, 진짜 꼬셔서 애교가 진짜 정말 아빠한테 많았어. 애교를 떨어야 뭐가 나오니까. 그래서 다윤이가 좋아하는 색이 민트 색깔이었어요. 신발도 민트 옷도 민트 아이스크림도 민트. 그런 거를 그렇게 사서 아빠한테 꼬셔서 사고, 수학여행 가기 전에 저희 교회에서 임진예배라고 있어요. 가족사진 찍으라고 하더라고요. 가족사진 찍었는데 다윤이가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찍은 사진 드물었는데 그때 만큼은 정말 해맑게. 가족사진 보셨나요? 우리 가족사진?

(스마트폰에서 사진첩을 보여주며) 다윤이가 좋아하는 강아지 깜비에요. 다윤이는 애라면 환장해요. 애라면 미쳐가지고. 이거는 세월호 배 안에 애들이랑 같이 밥먹고 하는 거 우리가 찍어 놓은 거고.

이거는 재작년에 부산 같이 갔었거든요 생전 처음 진짜. 교회를 다니다 보니 주일날 교회 가게 되니까 여행을 가게 되도 시골에 할머니 할아버지 계셔서 일을 데리고 가서 일을 늘 같이 했거든 가족여행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이거는 수학여행 가기 전 4일 전에 찍은, 목요일에 찍었고, 걔가 화요일 날 갔으니까. 이런 애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은데. 다윤이가 좋아하는 색깔 민트. (패딩 코트 지퍼를 열어 안에 입은 민트색 니트를 보이며) 이거를 누가 떠서 주더라고 이거를 해가지고. 누가 주더라고 다윤이가 좋아하는 색 입고 다니라고. 따뜻하고 좋아하는 색이라 애가. 그냥 민트 보면 생각나고. 이거 봐 바지도 민트잖아. 신발도 민트 집에 있는 신발도 민트.

다윤이가 그렇게 친구가 많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다 친해 그중에 세네명 네다섯명 있었던 거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윤이는 엄마아빠를 너무. 우리는 그냥 제 딸이니까 사랑하고 예뻐해주고 잘못하면 혼도 내고 했는데. 다윤이는 그냥 외려 우리가 다윤이한테 준 사랑보다 다윤이가 우리한테 준 사랑이 너무 커요. 그리고 애가 좀 많이 아팠거든요. 너무 많이 아팠기 때문에. 건강해야지 하는데. 그래선지 다윤이가 철이 빨리 들었어. 엄마아빠 외에는 없었어 정말. 큰애는 외려 친구랑 저거 하느라 너무 밖에 하느라 바빴는데 다윤이는 엄마아빠 너무 챙겨서 학교 도착하면 도착했다고 문자오지 출발하면 끝났다고 출발한다고 오지 엄마 이제 거의 다 집에 다 왔어 문자오지. 애는 진짜 엄마 아빠 옆에 껌딱지 같이 붙어 있었어. 누워 있으면 와서 껴안아 주고. 제가 몸이 안 좋으니까 애가 인터넷에서 마사지 이런 거 배워요. 그래서 마사지 해주고. 나는 내 몸이 귀찮으니까 치대는 거 귀찮아했어요. 그런데도 그렇게 하더라고. 정말 엄마아빠를 너무 사랑했던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다윤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엄마 딸이어서 너무 고마웠고 고맙다는 말. 수학여행 가기 싫다는 애를 내가 보내서 미안하고 아직도 찾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내가 다윤이 엄마라는 게 미안하고, 다윤이를 사랑한다는 말은 안하고. 우리 다윤이도 아니까. 그냥 미안하다는 지금은 그래요. 미안하다는 그거 말고는 어떤 말도 못하겠어요. 그냥 다윤이한테 빨리 가고 싶다는 것 외에는. 근데 딸을 찾아야 되니까. 아픈 것도 문제가 안 되더라고. 딸을 찾아야 되니까.



#허흥환씨(허다윤양 아버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 많죠. 많은데. 지금 제가 현재는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요. 자식 잃은 부모가 뭐를 할 수 있겠어요. 다 애 찾는 것. 생명을 존중하는 어느 나라든 그렇지만 이런 문제 같은 경우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 모든 것이 개인 잘잘못을 떠나서 국가가 책임을 쳐야 할 문제잖아요. 국민이기 때문에. 오래 수색 했다지만 사실 수색한 시간만 따지면 굉장히 짧거든요. 그걸 뭐 진짜 뭐 누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너무 많이 왔지만 그 자리에 9명이 있기 때문에. 부모들이 그걸 놓고 묻을 수는 없잖아요.

인양 문제가 거론되기까지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진짜 가족들이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정부에서 이거는 해줘야 된다고 생각 하는데 처음부터 정부도 그렇고 대통령도 그렇고 약속 했잖아요. 마지막 한사람 까지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책임 있으면 묻겠다고. 근데 지금 아무것도 할 생각을 안 하고. 계절적으로 가장 좋은 4월 16일 그 자리에 서버렸잖아요. 걔네들은 아무리 1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그런 개념도 없어요. 그냥 4월 16일 그대로야. 왜 거기 있기 때문에 아직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걸 그냥 나두고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고. 정부가 마지막까지 해줘야 되고 찾아줘야 모든 국민들이 아 기억하고 하는데 그것조차도 잊혀 지게 만들려고 하는 꼼수를 부린다는 것은 저도 여태까지 지내온 세월 더듬어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아침 일과는 9시 반에 안산 분향소에서 광화문으로 출발해서 가족 분들 내려놓고 우리 둘은 청와대 피켓시위 하고. 거기서 11시부터 12시까지 하고 같이 광화문 내려와서 가족 분들하고 점심 같이 먹고 피켓시위 하고 이걸 3시까지 하고. 부모들이 지금 오랜 기간 기다리다 보니 몸도 많이 상하고 그래서 때로는 병원 치료도 가고 해서 장시간 서 있을 수 없어서. 하루 일과는 그렇고 다른 또 누가 만나자고 하면 지방이고 어디고 가족들 이끌고 다니고 있어요. 많은 인원이 아니기 때문에 힘들긴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죠. 부모이기 때문에 계속 싸워야겠지만 돌아오는 그때까지 계속 할 겁니다.

제 생각이지만 다른 부모들도 걱정 많이 할 것 같아요. 아마 가지 말라고 하는 부모가 꽤 많을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큰애가 또 어디 학교 가야 한다고 하면 가지 말라고 할 것 같다. 사실 다윤이도 수학여행 안 간다고 죽어도 안 간다고 했어요. 성격이 소심해가지고. 그런데 애들이 단체로 가는데 안가면 갔다 와서 뭘 이야기를 하겠어요. 어울리지를 못하는데. 그런 것도 그래서 가야된다. 이번 기회에 가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공부하면서 받았던 스트레스도 풀고 하고 달래고 달래서 보냈는데, 뭐를 알았던 것 같아요. 그날 밤에 자기가 싹 씻고 아빠가 좋아하는 물품 달라 그래서 갖고 가고 생전 용돈 안 달라고 그러던 애가 가니까 용돈도 달라고 그러고. 그냥 만 원짜리 하나 줬는데, 그날 가면서 아마 애들이랑 뭘 사 먹었나봐요. 3000원 사먹고 7000원 남기고 그것도 유품은 나왔거든요.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더라고요. 유품은 안나와도 되고 사람이 나와야 되는데. 핸드폰도 다 가방에 넣고 옷만 자기 입고 있는 옷만 안 나오고.

사고 전날 다윤이한테 이모가 5만원 주고 작은 이모가 좀 더 줬는데 다 엄마한테 그걸 맡기고 5만원짜리만 받고 밤 열한시 쯤에 제가 쓰던 모자하고 아빠 나 내일 가는데 용돈 줘 해서 만원 주고 6만원 가져가서 5만원 그대로 있고 만원 짜리 하나만 딱 삼천원 사먹고, 지갑 그대로 모든 게 그대로 가방에 나왔어요.

다윤이 언니는 정신없죠. 다섯시반 알바 하고 열두시나 돼야 오고 아침에 얼굴 못 보지 저녁에 들어올 때 까지 기달렸다가 자고, 자고 일어나면 없어지고, 같이 만나서 밥 먹어 본지도 기억도 안 나고, 우리들 자체가 밥 먹을 시간적 여유도 잘 없고 들어가면 쓰러지기 바쁘고, 저 역시 뭐. 언니도 많이 힘들죠. 엄마 아빠한테는 전혀 내색을 안 하는데 가끔가다 애가 사라져요. 동생 학교가 20분 거리인데 분향소 둘러서 보고 학교 가면 아무것도 없어요. 다윤이 혼자 그 반에서 남아서, 맨 뒤에 남아 있거든요? 하염없이 풀릴 때까지 울다가. 어느 날은 안보이더라고 엄마한테 찾아보라고 하니까 학교 가서. 그런 내색을 안 하고 맨날 그렇게 다니는 거 아니까. 어떤 건지 아는 우리는 더 이야기 해줄 말도 없고 애들한테 뭐. 그냥 웃고 가족이 같이 좋은 것은 못 먹더라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나가서.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치킨 한 마리. 치킨. 봉급 타면 치킨.

벌이는 한정되고 많이 힘도 들고 어떨 땐 짜증도 내고 그랬는데 이제는 진짜 다윤이가 다 성장했고 할 만 할 때 되니까. 모든 부모가 다 마찬가지죠. 아무리 밉다고 말해도 버릴 수는 없으니. 아빠를 너무 많이 귀찮게 했지만 저는 행복했죠. 행복한 가정이었고 그냥 더한 부모도 많죠. 거의 유가족 분들 중에 외아들 외동딸 많더라고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반도 안 되고. 그래도 찾아는 줘야지. 이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안아볼 수도 없지만 그냥 끝까지 싸워서 인양해서 한번 안아보고 싶고 그거 외에는 뭔 말이 필요하겠어요. 함께 갔는데 함께 곁으로 보내는 줘야지. 따로 놓을 수는 없잖아 많은 친구들 있는데. 부모로서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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