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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바랜 사진 한장에…‘한국판 마타하리’의 실체가
현앨리스와 4대 가족사 10여년간 추적
잘못 알려진 사진속 인물들 바로잡아
‘박헌영의 애인’ ‘한국의 마타하리’ 별명
숙청때 덮어씌워진 기소장 기록서 비롯

그는 혁명가의 삶을 추구한 진보주의자
시대의 희생양이자 디아스포라의 상징
역사적 울림에 좀더 관대한 성찰 필요



‘박헌영의 첫 애인’,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현앨리스의 실체적 진실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가 10여년에 걸쳐 현앨리스와 가족, 당시 상황을 복원해 펴낸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돌베개)에서 공개한 한 장의 사진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전설적 지도자’ 박헌영이 1921년 겨울 상하이에서 중국에 유학중이던 한국 학생들과 모여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는 박헌영과 현앨리스, 동생 현피터 외에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등 20여명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속 젊은이들은 잘 차려입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다. 맨 앞 정 중앙에는 박헌영이 약간 비딱한 자세로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사진은 박헌영이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시절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호치민 등 동아시아 각 국 혁명가들과 찍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거의 한 세기만에 전혀 다른 사진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정 교수는 사진을 찍은 시점을 바로 잡으며 현앨리스와 현피터가 상하이에 있었던 시기를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남매가 상하이에 있었던 시기는 1920년~1924년이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사진 속에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주세죽의 모습도 바로 잡고 호치민이란 인물도 아닌 것으로 확인했다.

이 사진 속 인연은 30여년 뒤 파멸로 끝난다. 1921년 봄 주세죽과 결혼한 박헌영은 1933년 상하이에서 체포된 이후 다시는 주세죽과 해후하지 못했다. 주세죽은 박헌영의 혁명동지 김단야와 재혼했지만 그도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처형됐다. 노동교화형에 처해졌던 주세죽은 1953년 박헌영의 재판소식을 듣고 유배지에서 모스크바로 가던 중 폐렴으로 사망했다. 박헌영과 현앨리스는 1956년 평양에서 처형된다.

신간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는 ‘박헌영의 첫 애인’, ‘한국의 마타하리’란 선정적 문구로 가려진 현앨리스의 뜨거웠던 사회주의 이상과 삶의 자취를 복기하는 동시에 체제 격변 속에서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이방인, 경계인의 삶을 새롭게 조명한다.


정 교수는 ‘한국의 마타하리’란 수식어가 현앨리스에게 붙게 된 게 1955년 북한에서 김일성의 최대 정적인 박헌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박헌영을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및 ‘공화국 전복’ 혐의로 사형 판결을 내릴 때 기소장에 “1920년 상해 시절 박헌영의 첫 애인이었으며 미국의 스파이로서 박헌영의 도움으로 북한에 입국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 현앨리스 기록이 포함돼 있다. 1920년 미국 정보기관의 공작원으로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을 포섭하는 역할이 현앨리스에게 덮어씌워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박헌영과 현앨리스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의 꿈을 함께 키워온 오누이 같은 사이였다. 사랑과 결혼의 대상도 서로 달랐다. 둘은 상하이 유학 후 25년여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박헌영이 미군과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현앨리스와 이사민을 북한에 입국시켜주고 이들에게 외무성, 조선중앙통신, 조국전선 등의 일자리를 주선해 준 게 빌미가 돼 결국 처형당하게 된다. 북한에서 주장해온 ‘박헌영 간첩사건’의 실체다.

정 교수는 밝혀지지 않은 현앨리스의 행적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아나서 4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가 세계체제와 충돌하면서 어떤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됐는지 꼼꼼하게 재구성했다.

현앨리스가 상하이에 가게 된 계기는 아버지 현순이 상하이에 망명한 데 따른 것. 현순은 ‘조선독립단’의 상하이 특별대표로 활동하며 3.1운동의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소식을 중국 미국 유럽 등지에 전하는 한편 해외 정보를 국내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주요 독립운동가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도 기여한 인물이다.

현앨리스는 하와이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대학을 다니던 중 3.1운동 직전 상하이로 망명한 아버지를 찾아 남은 가족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간다. 그녀는 상하이에서 사회주의와 혁명의 뜨거운 에너지를 대면했고 이후 진보주의자와 혁명가로서의 삶을 추구한다. 동생인 현피터와는 1930년대 후반부터 현앨리기스가 체코로 떠난 1949년까지 인생의 행로를 같이했다. 남매는 1930년대 하와이에서 노동조합운동과 미국공산당 활동에 참여했고 1948년에는 미국 공산당 당원이 된다.

정 교수는 현앨리스를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상징으로 제시한다. 해방후 한국에 들어온 현앨리스는 1946년 주한미군 내 공산주의자들인 제플린, 프리쉬, 클론스키 등과 박헌영을 면담했다는 이유로 북한의 첩자로 추방되고 이후 미국에서 진보진영에 깊숙이 관여하다 북한행을 결행한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체코 프라하를 거쳐 1949년 평양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낯선 세계였다. 북한은 그녀를 이질적 존재이자 위험요소로 간주했고 그녀를 통해 박헌영까지도 미국의 스파이로 규정, 제거해 버린 것이다. 고향을 상실한 채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다중적 정체성을 지녀야 했던 현앨리스는 시대의 희생자였다.

정 교수는 “한국 현대사는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한 여성의 치열했던 삶을 스파이의 우극으로 마멸시켰지만 미래 한국은 묘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그 삶이 전하는 역사적 울림에 좀더 진지하고 관대한 성찰을 갖게 될 것이다”고 뒤늦은 조사(?)를 썼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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