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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난세계사] 메리의 사랑…짙게 드리워진 그림자
[HOOC=이정아 기자] 순수한 사랑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들어 차 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세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저 가슴이 뛰는 대로 이성을 사랑한 20대의 메리가 너무 어렸던 걸까요, 메리를 발판으로 왕이 되고자 한 남성들의 욕망이 너무 차가웠던 걸까요. <죽음의 행렬, 메리의 남자들> 10일자 기사의 다음 이야기입니다. (*) 이전기사 보기= http://goo.gl/FLzUyx



# 메리를 배반한 두 번째 남편= 내로라하는 유럽 궁정의 왕자들을 뿌리치고 메리 스튜어트는 젊은 미남 헨리 스튜어트 댄리와 약혼합니다. 메리의 나의 23세. 그의 두 번째 남편입니다. 메리와 댄리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뜨겁게 사랑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메리와의 결혼 2년 만에 댄리는 목이 졸린 채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거든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댄리는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후손이면서도 스코틀랜드 귀족인 레녹스 백작의 장남입니다. 그래서 메리와 댄리의 결혼은, 필연적으로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자베스 1세와 메리의 이복 오빠 제임스 스튜어트 모레이 백작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하게 됩니다. 왜냐고요?

메리 스튜어트의 두 번째 남편 댄리. 댄리는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짜고 메리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던 젊은 음악가이자 비서관이었던 데이비드 리치오를 죽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메리는 댄리에 대한 마음을 굳게 닫게 된다.

우선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가 재혼한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였거든요.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 1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공표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창녀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습니다. 메리와 댄리의 결혼은 곧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이 엘리자베스 1세 보다 메리 스튜어트에게 돌아갈 공산이 더 커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메리의 이복 오빠 제임스 스튜어트 모레이 백작의 경우, 메리를 몰아내고 자신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고 싶었던 야망이 메리의 두 번째 결혼 배우자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됩니다. 메리가 다른 나라 왕가의 자제가 아닌, 스코틀랜드 귀족 집안 맏아들과 재혼을 했으니 나라 안에서 메리의 권력기반은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메리를 시기하는 시선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도 메리의 두 번째 남편인 댄리는 긴장하기는 커녕 메리의 속을 썩입니다. 어느새 댄리가 자신이 왕인 것 마냥 허풍을 떨며 오만하게 행동했기 때문이죠. 댄리는 “감 놓아라, 배 놓아라”하며 사사건건 정치에 간섭하는 것도 모자라, 엘리자베스 1세와 물밑에서 작당하고 메리의 총애를 얻었던 젊은 음악가 데이비드 리치오를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댄리를 향한 메리의 사랑이 차갑게 식어버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죠. 이 때부터 댄리에 대한 메리의 감정은 분노와 증오,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 왕이 되고 싶었던 세 번째 남편= 이즈음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해군 제독인 보스웰 백작을 만납니다. 보스웰은 희대의 간신으로 꼽히는 아주 몰염치한 유부남입니다. 하지만 보스웰의 남성미가 메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죠. 보스웰 에게 마음이 뺏긴 당시 메리의 연애편지를 보면 “그를 위해 나의 명예와, 양심과, 가족을 포기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끊임없는 권력 싸움에서 나 홀로 여왕의 권위를 지켜내야만 했던 메리에게 보스웰은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든든한 기둥과 같았던 걸까요.

메리 스튜어트의 세 번째 남편 보스웰. 보스웰이 메리의 두 번째 남편 댄리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귀족들은 이 살인 사건에 메리가 가담했다고 판단,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제부터 보스웰에게 사랑에 눈이 먼 메리의 끔찍한 일막이 시작됩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지만 메리는 댄리 살인 사건에 가담하게 되거든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유폐된 집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은 댄리. 그는 1567년 2월 에딘버그 시 성벽 밖 인적이 드문 어느 길가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의문의 대폭발로 검게 그을은 마차에서 댄리는 목이 졸린 시체로 발견되는데, 보스웰이 이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댄리가 죽자 보스웰의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보스웰은 메리를 납치해 자기 성(城)에서 강간한 뒤 결혼을 강요합니다. 추문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메리는 보스웰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각에선 메리가 보스웰을 여전히 사랑했다고도 해석하는데, 보스웰이 여성을 성적인 대상 아니면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생각하는 불한당이었다는 것만큼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메리 혼자만의 일방적이고도 뜨거운 사랑이었던 것이죠.

이 즈음입니다. 메리에게 등을 돌린 귀족들과 백성들이 결속해 곳곳에서 창과 칼을 뽑아듭니다. 메리의 이복 오빠 제임스 스튜어트가 이를 기회로 여기고, 물밑에서 메리를 ‘희대의 살인마’, ‘남편을 죽인 탕녀’로 몰아가며 반란을 도모했기 때문이었죠. 반란군과 맞서던 보스웰은 세가 불리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내뺐고, 졸지에 국민과 남편에게 버림받은 메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을 시기한 이웃나라의 여왕이란 사실도 망각한 채 말입니다. 

파서링게이 성의 재판장. 1587년 메리는 이 곳에서 처형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메리를 마주한 엘리자베스 1세는 “전 남편 단리의 죽음에 메리가 개입했다”는 의문의 문서가 담긴 상자부터 내밉니다. 도무지 해명할 길이 없는 종이 뭉치로 인해 메리는 결국 유폐되죠.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이 때 제시된 이 문서가 위조된 것인지 진짜인지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메리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고 기록됩니다.

아무튼 아름답던 갈색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감옥으로 옮겨지며 서서히 죽어간 메리.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가 다시는 왕위를 노리지 못하도록 그를 반역죄로 몰았고, 끝내 메리는 1587년 파서링게이 성 강당에서 처형을 당합니다. 마지막까지 여왕다운 존엄을 잃지 않으며 단두대 밑으로 걸어 들어간 메리. 메리는 ‘사랑에 눈먼 여왕’인가요 혹은 ‘남편을 살해한 음탕한 여왕’인가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였던 그의 삶은 ‘지상 최고의 영예’로 가득 차 있었던 걸까요, ‘참담하기 그지없는 비극’이었을까요.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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