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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남녀]폭력도 사랑일까?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이란 어느 의학자의 연구결과가 나온 뒤, 사랑은 슈퍼마켓 진열대에 유효기간 딱지를 붙이고 소비자를 기다리는 상품처럼 여겨진다. “내 사랑만은 달라”라고 한들 소용없다. 그건 그저 호르몬의 장난이고, 시간은 3년을 향해 거침없이 흐른다. 반발하고 싶지만 사랑의 묘약을 마셔본 이들은 어느 순간 가슴 속 뜨거운 불이 사라진 걸 알기에 잠잠할 뿐이다. 어떤 이들에겐 이마저도 길게 느껴질 수 있다. 설레고 환하고 안타깝고 아프고 불안했던 그 사랑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이런 의문은 이혼의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더 미스테리하게 여겨질 법하다. 분명 뜨겁게 사랑해 결혼했는데 원수가 된 사랑, 그래서 다시 찾아온 사랑도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결혼실패자이자 알콜중독자였던 스타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는 단편 ’풋내기들‘을 통해 이런 이혼 남녀 부부의 불안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소설공간에서 불안은 환했던 햇살이 점차 물러나 도망치고 어스름이 거인의 그림자처럼 밀고들어오는 경계의 시간대를 따라 커진다.
토요일 오후의 식탁, 친한 벗과 함께 하는 자리는 느긋하고 안락하다. 심장외과의 허브와 테리부부, 닉과 로라 부부는 그렇게 진을 주거니 받거니 마시며 자연스런 대화를 이어간다. 커다란 창밖으로는 햇살이 가득 들어찬다. 이들이 사는 곳은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거친 벌판과 바람의 냄새, 햇살의 투명함만으로도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곳이다.

어쩌다 화제는 사랑이야기로 흘러간다. 테리는 허브와 살기 전, 칼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와의 마지막 밤, 테리는 칼에게 발목을 잡혀 거실바닥에 질질 끌려 다니며 두들겨 맞는다. 그렇게 끌고 다니며 칼은 테리에게 “사랑해, 모르겠어?”라며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자 한다.
허브 부부는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식탁에서 옥신각신한다. 테리는 칼이 분명 자신을 사랑했다고 주장하고, 허브는 그건 정신이상이라고 몰아친다. 허브와 테리를 죽이겠다고 22구경 권총을 사 겁박하고 쫒아다닌 칼은 마침내 권총자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테리는 그런 칼을 지금,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테리는 칼의 자살 직전, 칼의 아이를 가졌고 낙태했다는 사실을 닉과 로라에게 털어놓는다.

소설에는 여러 사랑의 모습이 나온다. 한번의 이혼경험이 있는 허브와 테리, 닉과 로라의 사랑 외에 에피스드로 두 개의 사랑이 더 들어있다. 칼의 폭력적 사랑과 심장외과의 허브가 경험한 교통사고 당한 노부부의 사랑 얘기다.
일상 끝으로 밀고가는 칼의 절박하고 위험한 사랑과 일상을 행복과 환상으로 만들어가는 노부부의 사랑은 대조적이다.

술취한 픽업트럭에 치여 숨만 겨우 붙어있는 정도로 병원에 실려온 노부부는 24시간 수술 끝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는다. 기적적으로 조금씩 회복을 보이기 시작한 두 노인은 얼마 후 각각 다른 일반 병실로 옮겨진다. 좀 더 회복이 빠른 할아버지의 표정은 마냥 어둡다. 허브는 노인네가 왜 우울한지 묻는다. 할아버지는 아내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아내의 병세도 나아져 서로 병실 상봉을 한 두 사람은 수십년 떨어져 있다 만난 사람 마냥 반기고 쉬지 않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두 부부의 모습이 신기하기만한 허브는 노인네의 결혼 생활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다. 목장에 사는 노부부는 평생 딱 두번 짧게 떨어져 있었을 뿐 평생 붙어지냈다. 겨우내 눈이 쌓이면 세상과 단절된 채 둘만 남은 적막한 목장, 오락거리랄 것도 없는 때에 그 따분한 시간을 어떻게 지냈을까.
노인네의 대답은 의외다.
“매일 밤 무도회에 갔다오.”
둘은 거실에서 축음기를 틀어놓고 레코드판이 끝날 때까지 둘이 껴안고 춤을 추고 난 뒤, 잠자리에 들어 눈오는 소리를 듣고 잠이 들었다고 했다.

미국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양 쪽에 서있는 두 사랑의 모습은 두들겨 패며 바닥을 질질 끌고다닌 남자를 사랑한다는 테리와 조용히 상대를 바라보는 거리를 원하는 닉의 사랑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성욕은 유아의 경험과 충족되지 않은 어떤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누구나 용인할 만한 정상범위에 들 때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렇다고 벗어난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일상과 일상의 경계에 선 사랑 사이에 무수한 사랑이 있고 거기에 저마다의 사랑이 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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