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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세린 헬멧과 장갑, 이토록 견고하지 못한 보호막을 쓴 남자여…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상의 탈의한 이 남자. 헬멧과 장갑으로 무장하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표정은 짐짓 도발적이나 그가 착용하고 있는 보호 장비들이 허술하다. 단단한 고체인 것 같지만 곧 녹아 흘러내릴 듯…. 바셀린이다.

쉽게 변형되고 왜곡되는 바셀린이 이 남성 파이터의 헬멧과 권투장갑이 됐다. 어린 시절 갖게 된 화상으로 늘 바셀린을 가까이 하고 살았다는 작가 백정기는 남성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들이 실은 얼마나 견고하지 못한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백정기, 바셀린 헬맷과 장갑, C프린트, 105.5×72㎝, 2007 [사진제공=아트선재센터]


한국과 중동의 작가 25명이 이 시대 남성성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18일부터 서울 종로구 율곡로길 아트선재센터(관장 정희자) 전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그만의 방 : 한국과 중동의 남성성’은 각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서 관념적인 남성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3층에 전시된 이스라엘 출신 작가 로미 아키튜브의 설치 작품도 눈길을 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ㆍ1869-1954)의 작품 ‘춤’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낙원에서 춤을 추는 다섯 명의 여성은 이 작품에서 남자로 바뀌었다.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춤을 추고 있는 이 남자들은 손이 아닌 서로의 성기를 잡고 있다. 게다가 이들의 몸 전체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모양도 냄새도 영락없이 꿀이다. 글리세린을 소재로 꿀을 형상화했다. 성경 속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일컫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유태인들의 꿈과 좌절을 남성성과 연결시킨 작품이다. 닿을 수 없는 이상향 가나안처럼, 남성성 또한 결코 잡을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작가는 묻고 있다. 

로미 아키튜브, 춤, 글리세린 등 설치작품, 2014 [사진제공=아트선재센터]

터키 작가 굴순 카라무스타파의 멜로드라마 영상 ‘우는 남자들’에는 한 때 유명했던 60~70대 터키 배우들이 등장한다. 이 마초적인 남성들은 고작(?) 여성에게 상처받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상실’을 연기한다.

한국 작가 홍영인의 ‘이중의 만남’에서는 남성성의 실체가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전시장 천정부터 바닥까지 드리워진 투명한 천에 각국의 동상들을 자수로 새긴 작품이다. 동상의 대부분은 남성들이며 근대 영웅주의의 표상이다. 조명을 비춘 커튼의 반대 쪽 벽면에는 영웅들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부유한다. 남성 영웅주의의 허상을 짚어 냈다. 

한국작가 홍영인의 ‘이중의 방’ 설치 전경. [사진제공=아트선재센터]

전시는 25일까지. ‘찌질’하다고만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오늘날 남성들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을 가져볼 수 있는 기회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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