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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픈 청춘이 꿈 이룰때까지 ‘맨땅에 헤딩’
실용주의 총학생회장서 사회운동가로…늦깎이신랑 김상민 새누리당 의원 “공평한 기회 만들어 꿈 포기않게 도울터”
“인터뷰 기사가 정치면이 아닌 연예 쪽에 실리게 되는 게 아니겠지요?”

결혼식을 하루 앞둔 지난 5일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호방한 웃음 속에 조심스레 꺼낸 말이다.

“처음 해보는 결혼이라 정신없네요” 바로 다음날 있을 결혼식 준비로 바쁜 김상민 국회의원의 표정은 해맑았다. 사회운동가 출신 의원에서 한 여인의‘ 남편’으로 또 하나의 이름표를 달게 된 그는 “모든 사람의 꿈이 이뤄지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1인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기 전에 마흔셋 늦깎이 신랑이 된 그의 얼굴은 결혼준비로 약간은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말투에서 풍기는 생기만큼은 더없이 밝았다. 그렇지만 국회의원으로서의 성과보다 ‘셀러브리티’의 결혼이라는 다른 포커스로 주목받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느껴졌다.

유독 현역 국회의원의 결혼이 많았던 19대 국회에서 세 번째로 결혼식을 올린 새누리당 김상민 의원의 이야기다.

1990년대 후반 대학가 총학생회의 대세였던 한총련계에 반기를 든 실용주의 학생회장에 이어 청년 자원봉사단장, 박근혜 대통령 당선의 최선봉에 선 선대본부 청년본부장, 19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이라는 화려한 이력에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또 다른 타이틀이 붙게 된 김 의원에게 이 시대의 청년과 꿈에 대해 들어봤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아마 톰 소여?=좋게 말하면 모험심이 남다른 아이, 나쁘게 말하면 말썽꾸러기 천방지축이었죠. 어른들이 너는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났으면 훨씬 즐겁게 살고 잘됐을 거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수원 토박이인 김 의원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요약했다. 7살 나이에 전철표를 끊어 수원에서 서울을 오가는 등 그 나이 때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저질렀다고 했다. 이렇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이끌어준 부모님 덕에 남이 시키는대로보다는 본인이 행복한 일을 하는 것에 만족하는 인생관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이런 학창시절을 보낸 후 대학(아주대)에 들어간 그가 가장 먼저 맞딱뜨린 것은 캠퍼스의 낭만과 자유가 아닌 학내의 부조리와 총학생회라는 집단의 억압이었다.


“2학년 때 학교상징물을 정하는 데 총학이 일방통행을 하더군요. 그걸 지적하는 소수 의견으로 대자보를 썼는데 동아리방이 쇠파이프에 부서지고, 일부로부터는 테러 협박까지 당했어요. 나중에 저의 자퇴와 총학 총사퇴를 걸고 총투표를 했는데 결론은 이겼습니다. 그렇게 학생정치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총학은 그러고 나서 사퇴를 안 하더라고요.”

김 의원은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첫 번째 터닝포인트라고 말했다. 이후 군에 다녀왔지만 학교는 변함이 없었다고 했다. 이를 뒤집기 위해 학생회장에 나섰고, 1990년대 후반 한총련이 장악한 대학가에서 이례적으로 정치색을 띠지 않는 실용주의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며 목회자의 꿈은 사회운동가로 바뀌게 됐다.

▶‘맨땅에 헤딩’하며 사회운동 첫발 내딛다=대학을 졸업하고 모두가 행복하고 믿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포부를 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이 제시하는 꿈과 포부에 세상은 ‘너부터 커라’는 식으로 무시하고 외면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사회운동, 투자 못 받으면 내가 벌어서 하면 된다’였다.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 그의 말대로 ‘별 짓’을 다했다고 한다. 한우음식점으로 잘나가나 했더니 광우병 파동에 사업을 접기도 했고, 뮤지컬 등 공연사업과 기업 컨설팅으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별다른 후원없이 그의 말대로 ‘맨땅에 헤딩’하며 사회운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설립한 단체가 김 의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대학생자원봉사단 ‘V-원정대’였다.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서는 배우보다 기획하고 연출하는 ‘감독’이 어릴 때부터 자신의 기질에 맞는 것 같다고 했다.

‘V-원정대’ 역시 설립자로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각종 봉사 행사와 프로그램을 기획ㆍ조율하고 외부에 협조를 구하는 역할에 더 집중했다.

“V-원정대 활동을 하면서 여러 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 이름으로 받은 상은 없어요. 우리 단체 혹은 수고했던 분들의 이름으로 수상했습니다. 단체에 주어지는 상이지, 김상민이라는 사람에게 주는 상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키워진 봉사단체 ‘V-원정대’는 전국 수백개 대학에 2만여명이 활동하며 ‘88만원 세대’로 꿈을 잃은 대학생에게 희망을 제시하면서 공정한 사회실현을 향한 길을 젊은이들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2012년, 느닷없이 새누리당이 나를 찾다=2012년 3월 가수 김장훈과 함께한 나눔 프로젝트 ‘도시락데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새누리당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추진하던 ‘감동인물 찾기’에 대상 인물로 선정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현장을 방문한 박 비대위원장과 첫 만남이 있었고, 그것이 ‘국회의원 김상민’이 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여야는 젊은 표심을 흡수하기 위해 이른바 ‘슈스케식’ 선출 방식을 도입하는 등 청년비례대표 영입에 경쟁적으로 나서던 때였다.

“‘새누리당에서 왜 날 찾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누리당이 젊은이들에게 좀 불편한 정당이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해주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죠. 정치인들이 젊은 세대의 힘든 현실을 봐야 할 필요성도 있었고요. 그렇게 박근혜 당시 비대위원장을 만났는데 박 위원장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알고 싶어했고, 그 간절함이 보였어요. 그래서 그 손을 잡고 국회까지 오게 된 거죠.”

이후 2012년 총선에서 이준석 비대위원, 손수조 후보와 함께 이른바 새누리당 ‘청년 3인방’으로 젊은 표심을 이끌며 19대 총선 승리에 일조했다. 특히 박 대통령의 대선 선대본부 청년본부장을 맡으며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슬로건을 직접 만드는 등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는 데에도 공헌했다.

▶만 38세, 왼쪽 가슴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다=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에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2030 청년들의 현실과 그들의 아픔을 정책으로나마 해결하고 싶은 각오로 여의도에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 마음가짐만으로 넘기에는 기존 정치구도와 국회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총선 대선에 이겼다고 모든 국민이 여당 편은 아닙니다. 청년을 품지 못하면 결국 반쪽짜리 세대정당에 머무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전하는데 제 목소리는 300명 중 1명의 외침이더군요. 이런 기존 정치와 많이 싸워왔습니다. 쥐뿔도 없는 놈이, 초선이 나댄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는 정치인으로 발을 들인 이상 꼭 이루고 싶은 것은 ‘억울한 사람이 없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에 안 억울한 사람 있습니까? ‘장그래’도 억울하고, 등록금 앞에 좌절하는 대학생들도 억울합니다. 왜냐하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거예요. 부당하다는 거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부당함이라는 장애물을 걷어내고 꿈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 ‘정치인 김상민’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가 김상민의 ‘3대 원칙’ 그리고 결혼=‘개인적인 재산을 모으지 않고, 봉사단체를 개인적으로 소유하지 않으며, 이 운동을 위해 결혼을 미루겠다.’

김 의원은 대학졸업 후 본격적으로 사회운동가의 길을 선택하면서 세 가지 삶의 원칙을 세웠다.


그에게 스스로 세운 원칙에 얼마나 충실했느냐고 물었다.

첫 번째, 개인 재산은 정말 없다고 한다. 작년 3월 국회의원 재산공개에서 ‘마이너스 600만원’을 신고해 전체 의원 중 꼴지에서 세 번째에 랭크됐다. 그동안 모았던 돈은 고스란히 ‘V-원정대’의 설립과 운영으로 쓰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두 번째, 그가 설립한 봉사단체 ‘V-원정대’의 대표는 따로 있다. 김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면서 단체설립자로서의 칭호만 남았다고 한다. 국회의원이 되고 ‘V-원정대’를 떠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끝으로 ‘결혼’에 대해서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이 원칙을 세웠을 때 국회의원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회운동을 하면 더는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이제 사회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자리를 옮긴 이상, 국가의 근본인 가정과 부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좋은 인연을 만났고요. ‘청년 김상민’에서 한 가정과 나라를 책임지는 가장이자, 온전한 인간으로 이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합니다.”

김 의원은 인터뷰 도중 몇번이나 걸려오는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결혼식과 관련한 전화라고 했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집안 어른인 듯 싶었다.

그 자리에는 한국 정치, 청년의 꿈과 미래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김상민 의원이 아닌, 결혼을 앞둔 ‘신랑 김상민’이 서 있었다.

유재훈 기자/igiza77@heraldcorp.com

사진=이길동 기자/gd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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