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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담배 한 대만…” 이러면 요즘엔 정말 ‘무개념族’
-담뱃값 인상 일주일만에…흡연풍경 유통풍경 상전벽해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담배인심 옛말, 얻어피우면 눈총

-그 흔하던 장초는 어디에?…개비ㆍ봉초담배 부활 조짐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정말 그 수밖에 없는 건가. 4500원이나 주고 사야해?”

직장인 이영권(41ㆍ가명) 씨는 담배갑에서 마지막 남은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지난해 세밑이 다가올 무렵 동네 슈퍼를 돌며 10갑 정도를 비축해 놓았지만 1주일만에 다 떨어져버렸다. 담배를 미리 구해놓지 못한 주변 동료들의 한 대만 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선심을 쓰다보니 시나브로 바닥 났다. 불씨가 필터에 거의 닿을 때까지 담배를 피운 그는 ‘후~’하는 한숨과 함께 마지막 연기를 내뿜었다.

담뱃값이 인상된 지 일주일. 2000원이라는 전례없는 인상폭에 사재기와 품귀 현상 등으로 애연가들은 전쟁 같은 연말을 치렀지만, 새해 들어서도 혼란은 가시지 않고 있다. 일부 외국산 담배가 가격을 올리지 않아 이를 구하려고 발품을 파는 이도 있고, 애꿎은 소매점에 하소연과 화풀이를 겸해 한탄을 늘어놓는 이들도 많다. 무엇보다 담뱃값 인상은 한국 사회의 흡연 풍경을 바닥에서부터 바꿔놓고 있다.

▶“용돈의 담뱃값 연동을 허하라”=IT업체에 근무하는 정일수(36ㆍ가명) 씨는 최근 아내와 부부싸움을 했다. 정 씨는 아내에게 ‘담뱃값이 올랐으니 용돈을 6만원에서 7만원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아내는 도리어 담배도 끊고 용돈도 줄이자는 식으로 나왔다.

정 씨는 “종전에는 밥 값과 교통비 그리고 담배 한 갑 사면 하루에 만원씩 들어 일주일을 버틸 수 있었는데, 이제는 담배를 줄이지 않는 한 방법이 없게 됐다”고 했다.

정 씨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담뱃값 인상의 후폭풍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매섭다.

서울로 유학와 직장을 잡지 못한 채 삼십대를 맞이하게 된 김수용(30ㆍ가명) 씨는 머릿속으로 한달 가계부를 어림셈 해보다가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향 부모님이 다달이 부쳐주는 용돈과 그가 과외로 벌어들이는 돈은 지난해와 그대로인데, 담뱃값 때문에 당장 이달부터 적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구직 기간이 길어지며 담배를 많이 줄인 그는 사흘에 한 갑 정도를 태운다. 기껏해야 한 달에 2만원 정도 부담이 늘어난 것이지만, 택시 한번 타고 다니는 것도 아까워 막차가 끊기면 새벽길을 몇시간씩 걸어다니는 그에겐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다.

형편이 어려우면 끊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김 씨는 “자판기 커피 한 잔 들고 담배 피우면서 수다 떠는 게 제 유일한 취미이고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예요. 생활이 어렵기는 하지만 이런 무의미해 보이는 사치가 그나마 저를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서울역의 노숙자들에게도 담배값 인상은 시련이다. 담배 인심이 후하기로 소문난 한국이지만, 담뱃값 인상 뒤로 야박해졌기 때문이다.

7일 서울역 주변에서 노숙을 하는 이모 씨의 손에는 예닐곱 개비의 담배꽁초가 들려 있었다. 모두가 짧은 꼬투리일 뿐, 흡연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장초(얼마 태우지 않고 버려 긴 담배꽁초)’는 하나도 없었다. 이 씨는 “예전에는 2~3cm씩 남겨두고 버린 것도 꽤 있었는데, 요즘에는 필터 쪽까지 바짝 피워서 쓸 만한 게 없다”며 “사람들한테 담배 달라고 해봤자 매번 허탕만 치니까 당장 피우고 싶을 때는 그래도 줍는 게 낫다”고 했다.

▶“담배없이 사회 생활을 어떻게 해”=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얼마 전에 퇴직한 김태한(61ㆍ가명) 씨는 정부의 담뱃값 인상 확정 발표가 난 뒤로 지인들과의 만남을 부쩍 줄였다. 40년 넘게 피워온 담배를 이번 기회에 끊으려는데 지인들 중에 한두명은 꼭 흡연자가 끼어있다보니 담배의 유혹을 참기가 힘들어서다.

김 씨는 “술을 많이 좋아하는데 술을 마시면 담배 생각이 나기도 하고, 사람들을 안 만나다보니 술을 마실 기회가 없어져 힘들다”며 “가끔 살아있냐는 전화라도 오면 다행인데 연락도 뚝 끊기니까 사회적으로 단절된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했다.

김 씨와는 반대로 사회적으로 단절되지 않아 담배를 끊고 싶어도 못 끊는 이들도 있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박철민(37) 씨는 1년째 이중생활 중이다. 아내에게는 담배를 끊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밖에 나와서는 직장 동료나 친구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운다. 박 씨는 “사회 생활하면서 담배를 안 피운다는 게 힘들더라고요. 업무라는 게 의사소통이 중요한 데 담배가 대화의 매개체잖아요. 그래도 요즘에는 담뱃값이 너무 비싸니까 그냥 얻어피우기 눈치보여서 가끔 커피 한잔이나 담배를 한갑 사주곤 해요”라고 했다.

<사진설명>새해 들어 담뱃값이 오르면서 흡연가들 사이에서 신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일단 후하던 담배인심이 야박해졌다. 그러다보니 ‘나홀로 도둑 흡연’이 늘어났고, 개비 담배도 부활했다. 사람들이 서울역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개비담배, 봉초담배… 부활? 일시적 유행?=담뱃값이 오르면서 대안을 찾아나서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새해 첫날 금연을 시작한 김진영(35ㆍ가명) 씨는 지난 1주일의 금연 실천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비록 니코틴의 부름을 못 뿌리치고 세번 담배를 피운 적은 있었지만, 그럭저럭 버텨냈기 때문이다. 김 씨가 피운 담배 세 대는 모두 길거리에서 파는 ‘개비 담배’였다. 김 씨는 “사실 개비 담배는 뜯어놓은 지 오래돼서인지 맛도 없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아서 입맛에도 안맞다”면서도 “그래도 금연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가끔 충동을 억제하기 위한 용도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봉초 담배’도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다. 봉초 담배는 잘게 썬 담뱃잎을 종이 봉투에 넣어 파는 형태로 흡연자가 직접 담뱃잎을 종이에 말거나 곰방대에 넣어 피운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는 봉초 담배의 일종인 연초와 필터를 구입해 직접 말아서 피우는 ‘롤링 타바코(Rolling Tabaco)’가 인기를 끌고 있다. 잎담배를 넣어 피울 수 있는 파이프를 찾는 이들 역시 늘었다.

<사진설명>새해 들어 담뱃값이 오르면서 흡연가들 사이에서 신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일단 후하던 담배인심이 야박해졌다. 그러다보니 ‘나홀로 도둑 흡연’이 늘어났고, 개비 담배도 부활했다. 사람들이 서울역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커피와 담배를 무척 좋아한다는 주창식(36ㆍ가명) 씨는 최근 담뱃값이 너무 올라 담배를 직접 말아 피워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접었다고 했다. 주 씨는 “커피 값이 비싸서 집에서 내려먹으려고 기계를 잔뜩 사놨는데, 원두를 갈고 하는 과정들이 귀찮아서 구석에 박아둔지 오래”라며 “담배를 말아 피우는 것도 보통 손이 가는 일이 아닐텐데, 지금의 가격이 적응되면 금방 사라질 유행 아니겠느냐”고 했다.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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