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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숲 관능의 숨소리…눈밟는 소리 들리는듯
극사실주의 회화 이광호 개인展
제주도 곶자왈 풍경 화폭에 담아
섬세한 묘사 풍부한 감수성 압도적



현대 회화작가들에게는 두 부류의 ‘모순(矛盾)’이 있다. 형체를 도통 알 수 없는 선과 점들을 잔뜩 찍어놓은 추상적인 작품을 보여 주고서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라고 말하는 부류와, 지극히 사실적인 대상 혹은 풍경을 묘사한 작품을 놓고서는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너머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부류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파이프를 그려 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던 르네 마그리트적(?)인 변명으로 관객들을 자극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회화 작가인 이광호(47)는 어느 쪽의 모순적인 변명도 늘어놓지 않는다. 작가는 생각하고 느낀대로 그리고, 관객들은 본 대로 느끼고 생각하면 된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2010년 극사실주의로 묘사한 대형 선인장 그림으로 주목받았던 이광호 작가가 이번엔 풍경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나무와 넝쿨이 뒤엉킨 제주도 곶자왈의 겨울 숲이 그 대상이다. 흰 눈 쌓인 숲길에서는 사각 사각 눈 밟는 소리가 들릴 듯 하고, 거칠게 엉켜있는 덤불에서는 메마른 촉각이 느껴진다. 오감을 자극하는 풍경이다.

최근 북촌 화랑가에는 난해한 현대미술 전시에 지친 관람객들에게 휴식을 주는 사실주의 풍경 혹은 정물화 전시가 잇달아 소개되고 있다. 이 가운데 이광호 작가의 사실주의적 풍경은 작품의 규모면에서는 물론 섬세한 묘사와 풍부한 감수성 측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정물에서 풍경으로…대상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인터뷰, 선인장, 그리고 덤불숲. 그림의 대상은 확대됐지만 작가와 대상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초상화 시리즈 때는 나의 시선과 (인터뷰) 대상과의 거리를 1m80㎝로 정확히 유지하며 그렸다. 선인장 때는 1m로 좁혀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상과 나의 거리가 제로가 됐다.”

해석하자면 숲을 단순히 관조하는 풍경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숲 속으로 걸어들어가 풍경의 일부가 됐다는 뜻이다.

“대상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면 대상을 ‘제어’할 수 있는데,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가 사라지면 객관적인 감정의 제어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의 풍경에는 겨울 숲을 거닐던 작가의 마음, 그리고 그 겨울 숲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절정의 푸르름을 떨궈내고 앙상히 가지만 남긴 채 다시 올 봄을 기다리는 초목에서, 벼락맞고 쓰러져 다른 생명의 자양분이 될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고목에서, 어떤 이는 생명을, 어떤 이는 죽음을 보게 된다.

풍경을 담은 그의 캔버스들은 가로 세로 1m가 훌쩍 넘는다. 작가는 캔버스에 담길 숲의 프레임을 생각한 후 부분 부분들을 세밀하게 채워가면서 전체 그림을 완성했다. 캔버스의 크기가 워낙 큰지라 부분 묘사를 할 때는 작가 자신도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할 정도다.

작가는 “숲을 헤매는 느낌”으로 자신의 감정이 그리는 행위에 녹아들기를 바랬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붓은 내게 애무의 도구”…그린다는 행위의 에로티시즘=“우울할 때 화방에서 붓을 사면 기분이 좋아진다.”

대형작품 위주의 풍경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숲의 묘사가 사진처럼 정밀하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수없이 작은 선들이 뒤엉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멀리서 보면 구상적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지극히 추상적이다. 유화로 채색한 캔버스를 얇은 고무 붓이나 판화도구인 니들로 긁어내 작업했다. 회화로 구현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한 폭에 담아낼 수 있었던 건 작가의 ‘붓 모으는 취미’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선인장 시리즈 때도 그랬듯, 이광호의 작품에는 ‘에로티시즘’적인 해석이 늘 따라붙는다. 선인장 혹은 덤불숲이라는 대상의 형태 자체가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의 작품을 1차원적인, 결과론적인 에로티시즘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관능적이라고 말했다.

“붓은 애무의 도구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대상을 애무하는 것과 같다. 또 숲은 내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정념의 공간이다. 붓이라는 애무의 도구가 유화라는 육감적인 질료를 만나 정념의 공간을 어루만지는 행위…그래서 야하다.”

전시는 2015년 1월 25일까지 삼청동 국제갤러리 1관. 

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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