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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 ‘미생에서 완생으로’…바둑에서 배운 그들의 한수
19줄 정방형 반상 위의 변화무쌍한 승부 ‘바둑’…경쟁 DNA 가진 슈퍼리치들의 쾌감·본능 자극…오늘도 그들은 완생을 위해 최선의 한수를 놓는다


[특별취재팀=홍승완 기자] 드라마 ‘미생’ 열풍으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여느 때보다 높다.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인 ‘장그래’의 눈에 비쳐지는 조직생활의 지난함과 비정함. 이를 바둑의 교훈으로 풀어내는 이야기 자체의 힘이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순수한 진심과 열정으로 위기와 음모를 돌파해내는 장그래의 모습은 ‘완생(完生)’을 꿈꾸는 수많은 우리 사회의 ‘미생(未生)’들에게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

드라마는 바둑돌 한알에 불과한 미생들의 고군분투에 맞춰져 있지만, 사실 바둑은 이미 ‘완생’한 슈퍼리치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다. 19줄 정방형의 반상(盤上) 위에서 벌어지는 변화무쌍한 승부가 주는 쾌감이, ‘경쟁의 DNA’를 가진 슈퍼리치들의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둑은 그 어떤 스포츠보다 비즈니스와 닮았다. 수많은 말들을 채워놓고 시작하는 체스나 장기와는 달리 바둑은 빈 공간에서 시작해 돌을 채워나가는 경기다.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 : 밑그림은 크게 보고, 한수 한수는 세심하게 두라)’이라는 말처럼 무에서 유를 향해 한수 한수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바둑이다. 기업 운영 원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산업화 시대에 성공을 거머쥔 대한민국의 많은 거부들이 바둑을 가까이 하고 사랑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인재 제일주의는 “바둑 1급 열 명이 머리 맞대도 바둑 1단 한 명을 못당한다”는 표현에 실려 전해졌다. ‘불멸의 승부사’ 조치훈 9단을 수십년간 후원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처럼 바둑에 대한 사랑을 표시해온 슈퍼리치들도 많다.

바둑을 가까이는 했지만 결국 경영에는 실패한 기업가들도 있었다. 대마불사의 정신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쓴맛을 본 기업가들을 우리는 많이 봐왔다. 꼬리에 꼬리를 문 바둑돌처럼 순환출자의 지배구조로 버텨오던 거대 기업들이 한순간에 쓰러진 모습도 눈에 선하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강덕수 STX그룹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등 많은 기업가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상대를 앞에 두고 한수 한수 심혈을 기울여 두는 바둑은 디지털ㆍ모바일시대인 지금도 여러 시사점을 던져주며 가치를 발하는 분위기다. 삶과 경영의 지혜가 담긴 반상의 향기가 온라인 네트워크처럼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검은 돌과 흰 돌의 연속으로 이뤄지는 바둑판은 0과 1의 조합만으로 무한 증식해나가고 있는 21세기의 디지털 사회를 연상케 한다.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고, 영역 간의 결합으로 새로운 산업이 탄생하는 오늘날의 모습은 바둑판과 꼭 닮았다. 장기와 체스의 말처럼 정해진 길만 달려온 우리 기업에 시대는 “바둑돌처럼 스스로 나아갈 길을 정하라”고 채근한다.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가 삼성 사장단 강의에서 말한 것처럼 “대마를 무겁게 하면 판을 끌고 가기가 어려워지는데 기업도 마찬가지다”고 말한 시대가 됐다.

바둑이 가르쳐주는 또 다른 메시지는 ‘공존’이다.

많은 기업인들이 ‘인생과 경영의 축소판’이라고 빗대는 스포츠 중 하나가 골프다. 하지만 바둑은 골프와도 확연히 다르다. 골프는 부단한 연습으로 다져진 기본실력 위에 준비된 장비, 나를 지원하는 캐디의 조언들을 바탕으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매니지먼트 운동이다. 한마디로 ‘경영자 관점의 스포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바둑은 국수로 하여금 반상 위에 얼마나 더 많은 돌을 살려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적의 왕을 사로잡기 위해서 병정이나 기사 따위쯤은 죽어도 괜찮은 장기나 체스가 아니다. 빼앗고 싶다는 욕망에 적진에 무작정 쳐들어가 사석(死石)만 늘리기보다는, 돌 하나를 더 아껴 튼실하게 벽을 치고 세력을 다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내 영역에 들어와 있는 적의 돌조차도 결국은 내 소중한 자산이 되는 승부이기도 하다.

작은 바둑돌 하나의 가치를 알고 이 돌들을 유기적이고 창의적으로 엮어내야만 이길 수 있는 것이 결국 바둑이다. 아울러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의 수’를 놓아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이 바둑이다. 프로바둑기사들이 대국이 끝난 뒤에도 이를 복기하며 패착과 승부처를 분석하고 신수를 연구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다시 미생으로 돌아와보자.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바둑판 위에 의미 없는 돌이란 없어”라는 대사로 수많은 직장인 ‘미생’들의 공감을 얻었다. 물론 그들에게 완생으로 비쳐지는 슈퍼리치들에게도 이 말은 예외가 아니다.

sw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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