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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정상회담들
[헤럴드경제 =원호연 기자]정상회담에 나서는 한 나라의 정상은 국가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상대국 정상과 만난다. 때론 언성을 높이고 때론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두 거인이 마음을 터놓고 두 손을 맞잡는 순간, 세계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1971년 7월 16일,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특별 성명을 통해 자신의 방중과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과는 체제 경쟁, 중국과는 국경 분쟁을 겪고 있던 소련은 발표 직전까지 미ㆍ중 정상회담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에 경악했다. 첩보작전을 방불케 한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은밀한 밀사외교 때문이었다. 그는 베트남과의 종전 협상을 하러 파리로 향하던 중 돌연 종적을 감췄다가 이틀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이틀 간 그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만나 닉슨 대통령의 방중에 합의했던 것이다.

닉슨은 회담에 대해 ‘역사를 바꾼 한 주’라고 표현했다. 실제 이 회담은 미ㆍ중 간 ‘데탕트’의 서막이면서 또다른 공산 진영의 맹주, 소련으로선 국제적 고립의 신호탄이었다. 상호 체제 인정과 불가침, 관계 정상화를 약속한 이 회담으로 미국은 동남아 전체의 공산화에 대한 우려를 떨치고 베트남전 철수를 마쳤고, 중국은 개혁과 개방에 나서면서 이후 G2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86년 10월 11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만났다. 냉전 시기 전세계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핵전쟁의 위기를 불식하고 핵무기 감축에 합의하기 위해서다. 대소 강경론자였던 레이건 대통령을 대화에 나서게 한 것은 1983년 KAL기 폭파 사건에서 느낀 핵전쟁의 공포였다.

비록 이날은 레이건이 우주공간에서 탄도미사일을 격추한다는 전략방위구상(SDI)을 포기하기를 거부하면서 회담이 결렬됐지만 양측은 다른 모든 쟁점에서 합의 바로 직전까지 도달했다. 결국 몇달 후 양국은 탄도탄요격미사일 금지조약(ABM)에 서명했고, 4년 뒤 조지 부시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와 함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서명하며 냉전의 종식을 알렸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서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결국 전쟁까지 치른 한 민족의 운명을 바꿔보려는 시도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예상을 깨고 평양 순안비행장에 직접 마중을 나왔고, 남북의 두 정상은 분단 55년만에 감격적인 포옹을 나눴다.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1국가 2체제의 통일방안 협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 ▷남북교류 활성화 등 합의사항을 담은 6ㆍ15 공동선언은 남과 북이 대결을 종식하고 대화에 나서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이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건설 등 남북 경협이 시작되고, 군 통신선 구축 등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지면서 남북 관계는 본격적인 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국제사회는 남북의 이같은 노력을 평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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