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故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의 인생과 어록
[헤럴드경제]“기업은 국가 경제의 주체이며 사회발전의 원천이고 직장인의 생활터전입니다. 후손에게 풍요로운 정신적·물질적 유산을 남겨놓아야한다는 건 기업가의 사명입니다.” 92세를 일기로 별세한 故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1987년 중앙대학교 정경대학에서 한 강연의 일부분이다.

산업화 격변기를 거치며 우리나라 화학섬유 산업의 최선두에서 의생활 혁명을 일으킨 그의 삶과 노력이 오롯이 드러난 대목이다.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를 늘 강조한 그는 목표를 향하는 등산식 경영과 아래를 살피는 공동체 책임을 경영 철학의 중심에 뒀다.

1947년부터 신은 가죽 슬리퍼를 50년간 신었다. 비서실에서 슬리퍼를 새것으로 바꿨다가 된통 야단을 맞고 쓰레기통에서 찾아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10년 넘게 입은 맨스타 트렌치코트, 등산갈 때 타던 9인승 승합차가 고인의 생활을 보여줬다고 코오롱 사람들은 기억한다.

▶섬유산업 1세대…최초로 나일론사 생산=1922년 경북 영일에서 이원만 창업주의 외아들로 태어난 이 명예회장은 어린 나이에 포항에 있는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고 열다섯에 아사히공예사 경리를 맡아 아버지를 도왔다.

낮에는 일터에 있다가 밤에 흥국상업학교 야간부를 다녔고 조선인 교수의 권유로 시험을 준비해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합격한 뒤 배움의 길을 이을 수 있었다. 1944년 스물셋에 입영 1주일을 앞두고 신덕진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결혼 1주일 후 쯔루가(敦賀)의 중부36연대에 조선학도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해 식민지 청년의 울분과 고난을 경험해야 했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온 청년 이동찬은 한국전쟁 여파로 제대로 의복조차 입지 못하던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하리라는 신념 아래 경북기업이라는 직물공장을 세웠다. 이후 더 큰 꿈을 품고 상경해 단칸 사무실에 삼경물산 서울사무소와 후일 코오롱상사의 모태가 된 개명상사를 1954년에 세웠다. 한일 간 무역을 시작하며 나일론 개화기를 앞당기게 된다.

1957년 이원만 선대회장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나일론사(絲)를 생산한다. 섬유산업 역사에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1963년 일산 2.5t 규모의 나일론사 공장 준공을 시작으로 잇따라 설비를 증설했고 1968년 판매 전담회사인 코오롱상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어 폴리에스테르에도 눈을 돌려 한국폴리에스텔을 설립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화섬산업 중흥기를 타고 도약한 코오롱은 1977년 그룹 회장제를 신설했고 이동찬 대표이사 사장이 회장으로 추대됐다. 열다섯에 기업 일을 시작한 이후 40년 만이었다.

1980년대에는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등 관련 분야로 영역을 확대해 사업다각화에 성공했다. 1983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이 된 뒤 섬유인의 숙원이던 섬유백서를 펴냈다. 1990년대에는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추진했고 유통업으로도 외연을 넓혔다.

▶경총회장 14년간 재임…노사 상생 위해 고심=이 명예회장의 이력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은 1982년부터 1995년까지 무려 14년간이나 한국경영장총협회장을 맡은 것이다. 노사문제가 심각해지던 1980년대 다른 대기업 회장들이 꺼리던 경총 수장(임기 2년)을 연거푸 했다.

1980년대 후반 노사분규의 홍역을 치른 뒤 1990년 노사와 공익대표가 참여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를 발족시켰다. 1993년에는 경총 회장으로서 협상에 직접 뛰어들어 한국노총과의 합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은 노사분규에는 경영자, 근로자, 정부 3자 모두의 책임이 있다면서기업을 이루는 4대 요소 중 근로자는 핵심이며 기둥임을 강조했다.

이윽고 1994년에는 산업평화선언으로 노사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이 명예회장의 노사관계 철학은 코오롱그룹의 경영방침에도 이어져 노사갈등이 극심했던 2007년 항구적 무분규를 골자로 하는 노사상생동행 선언을 도출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한국마라톤의 열성적 후원자…‘몬주익의 영웅’ 발굴= 이 명예회장은 비인기 종목인 마라톤과 육상 후원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5년부터 전국남녀고교구간마라톤대회를 주최해 마라톤 인재의 조기 발굴에 힘썼다.

코오롱 마라톤팀을 창단해 선수를 육성하던 그는 손기정 이후 맥이 끊긴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며 연구장려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명예회장의 바람은 당시 마라톤 한국기록을 잇달아 깨며 1억원의 연구장려비를 받은 황영조의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제패로 이어졌다.

▶“기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이 명예회장은 수많은 강연에서 자신의 경영철학을 전했다. 또 그는 수많은 어록도 남겼다. 그가 남긴 주요 어록은 다음과 같다.

“남이 장에 간다고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속담 식으로 어떤 업종이 호황을 이룬다고 무턱대고 뛰어드는 방식은 지양돼야 한다”(1986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초청강연)

“기업의 나 개인의 것이 아니다. 종업원 모두의 사회생활의 터전이며 원천인 것이다. 기업의 부실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며 배임이다”(1981년 KBS 방송강연)

“절대 무리하지 않고 분수에 맞는 경영을 펴왔으며 이상은 높게 갖되 겸허한 자세로 이를 정복해 나가는 등산식 경영과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가는 마라톤식 경영으로 코오롱을 이끌어왔다”(1991년 리쿠르트 인터뷰)

“나의 신념은 한 마디로 ‘기업은 곧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지금은 기업이 사회다른 분야로부터 인재를 스카우트해오던 과거의 달리 기업 내에서 양성된 인재들이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해 활약해야 하는 시대이다”(1982년 한국경영학회 주제강연)

“평사원은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작은 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임이 되고 대리가 되면 작은 전구여서 되겠느냐. 전구는 올라갈수록 촉수를 더해야 주위를 밝힐 수 있다”(1977년 승격자 사령장 수여식)

“마라톤은 일정한 페이스를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사업에서 신속하고 과감한 결정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전체 흐름 속에 모든 요인을 놓치지 않는 게 훨씬 중요한 일이다. 마라톤이 그런 가르침을 주곤 했다”(1992년 황영조 만찬회)

onlinenew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