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영웅에서 폐인으로, 실연에서 스토킹까지…억울한자들의 스토리 ‘소년은 늙지 않는다’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억울한 세상’을 살아가는 자는 억울하다. 또는 ‘억울한 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억울하다. 소설가 김경욱이 그리는 세계는 확실히 동어반복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억울하다는 것은 부조리하다는 것일텐데, 부조리한 것은 곧 인과 관계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다. 억울함의 다른 말은 부조리함이다. 부조리함은 인지 부조화를 낳고, 인지 부조화를 견딜 수 없는 인간들은 제 나름의 인과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억울한 세상을 억울하지 않게 바라보려 한다. 무모한 일이지만, 대개 평범한 사람들의 뇌는 자동으로 작동하는 회로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인지부조화’ 상태를 균형 상태로 만들어간다. 그러나 지나치게 억울한 자들의 지나치게 억울한 세상은 자동적인 인지조화가 불가능해서, 기상천외한 인과관계라도 발명해내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다. 지나치게 억울한 세상에선 음모론이 판을 치고, 지나치게 억울한 자들은 강박과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한편으로 슬프고 한편으로 우스꽝스럽다. 억울한 세상의 억울한 자들이 빚어내는 희비극의 풍경, 김경욱의 소설 세계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는 김경욱의 단편소설 9편을 묶은 신작 선집이다. 무엇보다 감탄스러운 것은 작가의 작화능력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마흔 셋, 등단 22년차 작가로는 적지 않게 열 세번째 책을 냈다는 사실이나 작가세계 신인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같은 수상경력으로도 뒷받침되거니와 그 동안의 작품에서 다양한 소재와 대중문화 장르 및 표상들을 부린 솜씨로도 확인된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김경욱 지음/문학과 지성사

이번에 수록된 첫 단편 ‘스프레이’에서 주인공은 아버지로부터 못난 자식으로 질책을 받고 살아온 이유도, 옛 여인으로부터 실연을 당한 이유도 땀이 심한 다한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결벽증처럼 정해진 시간과 순서를 지키며 살아온 그는 어느 날 아파트 경비실에서 다른 집의 택배를 가져오는 실수를 범한다. 그는 그 이유를 피곤해서, 피곤한 것은 잠을 못자서, 잠을 못 잔 것은 옆집 여자의 고양이가 밤새 울어서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킨다. 이후로 그는 일부러 다른 집의 택배를 훔치기 시작하고, 옆집 여자를 스토킹한다.

‘개의 맛’은 한때 ‘빨갱이 소탕’을 시대적 소명으로 생각하고 투신했지만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삶을 사는 중노년남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또 한번의 역사적 과업을 위해, 하늘처럼 모셨던 ‘어르신’을 찾아나선다. ‘빅브라더’는 어린 시절 뭐든지 잘했고, 서커스단에서 인간대포를 자임함으로써 하늘로 날아올랐던 형이 ‘영웅’에서 ‘폐인’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승강기’는 승강기 교체비 납부 문제로 아파트관리사무소와 씨름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집은 2층이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교체비용을 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직접 자기구제에 나선다. 자신이 운행하던 차량으로 매일 태우던 학원의 소녀가 실종되자 용의선상에 오른 ‘아홉번째 아이’의 주인공은 혐의를 벗기 위해 직접 나선다.

억울한 사정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음모를 발명하거나 비밀작전을 실행에 옮기나 그 결과는 그들의 ‘인지부조화’만을 입증할 뿐이다. ‘개의 맛’에서 ‘어르신’의 현재야말로 가장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특이하게도 표제작 ‘소년은 늙지 않는다’와 ‘인생은 아름다워’, ‘지구공정’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 ‘말하자면 SF’인데, 모두 어디선가 봤던 대중문화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는 영화 ‘싸이코’를, ‘지구공정’은 ‘그래비티’를 떠올리게 한다.‘인생은 아름다워’는 필립 K.딕의 단편 중 하나같은 인상이다. 어느 작품이나 잔기교나 군더더기 없이 인물과 이야기로만 승부하니 독자들은 “재미있다”고 승복할 수 밖에 없다.
 
/suk@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