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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철ㆍ박찬호의 ‘서예스승’을 만나다
-팔순기념 산수전 여는 원로 서예가 송천 정하건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삼성 본관 28층이 회장님 방이었어. 거기서 일주일에 한번씩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7년 동안 가르쳤지.”

해서체의 대가로 알려진 원로 서예가 송천(松泉) 정하건은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서예 선생으로 더 유명하다. 야구 선수 박찬호도 2002년 메이저리거 시절 슬럼프를 겪고 고국에 머물면서 그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추사 이래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치는 검여(劍如) 유희강(1911∼1976)으로부터 사사한 송천은 해서, 행서 전서 등 서예 오체(五體)에 모두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계사 일주문에 ‘대한불교총본산조계사’라는 현판 글씨를 쓴 것은 물론,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제액, 임경업 장군 묘역정화비문 등도 그의 손을 거쳤다. 

글씨 한번 직접 보여달라는 청에 그는 주저없이 붓을 들었다. 그리고 묵장보감에 나오는 시 구절 중 몇 글자를 해서체로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장낙만년상청(長樂萬年常靑)’, 즐거운 것이 만년이나 가며 변함없이 늘 푸르다는 뜻이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5일부터 11일까지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송천 정하건의 팔순 기념 개인전이 열린다. 그가 운영하는 서실이 문을 연 4월을 기념해 41년동안 매년 4월마다 그룹전 형태의 전시를 열었지만, 송천의 이름으로 개인전을 여는 것은 이번이 6번째다.

최근 간송미술관 가을 정기전 ‘추사정화’전에 젊은 관람객들이 몰려 매진 사례를 이루는가 하면, 인사동 이름있는 갤러리들에서도 한국의 수묵화와 서화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팔순 명필의 묵향 가득한 서예전이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전시를 앞둔 지난 30일 인사동 송천서실에서 그를 만났다. 

원로 서예가 송천 정하건이 자신이 운영하는 인사동 송천서실에서 글씨를 쓰는 모습.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단아하고 반듯한 글씨에서 호암의 인품 드러나”=“회장님은 글씨 연습을 할 때 날짜 지난 신문 위에 연습을 먼저 하고 손이 어느 정도 풀리면 화선지에 썼지. 내가 처음부터 화선지에 쓰지 뭘 그러냐 했더니 손 안 풀렸을 때 화선지에 쓰면 낭비라는 거야.”

1970년대 후반부터 송천의 7년 ‘서예 제자’였던 호암 이병철은 그에게 ‘검소하고 합리적인 경제인’이었다. 돈 많은 사람이니 잘 먹고 잘 쓰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번은 날 데리러 오는 기사 양반이 내 글씨 보는 게 소원이라고 그러는거야. 그래서 그게 무슨 소원씩이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회장님은 일류 아니면 상대도 안하는 분인데 선생님은 그렇게 오랫동안 회장님을 가르치시니 선생님 글씨가 정말 대단한 거 아니겠느냐 하는거야.”

그는 오랫동안 호암과의 인연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자신의 서예하는 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호암이 자신은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 싫으니 획 공부는 그만하고 글자부터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단다.

이에 송천은 당시 삼성 본관 옆에 짓고 있던 동방플라자 건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건축물을 높이 올리려면 기초 공사를 잘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기초를 잘 쌓아야 글씨를 잘 쓰게 됩니다.”

호암의 서예 실력을 묻자 그는 “열심히 했고 좋았다”고 평가했다. 너무 치켜세우기만 하는 거 아니냐고 묻자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글씨가 힘차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반듯하고 단아한 글씨를 쓰셨지. 그 바쁜 경제인이 꾀 한번 피우는 일 없이 흘리지 않는 정자(正字)를 또박또박 제대로 썼단 말이지. 글씨에서 그 양반의 인품이 보였어.”

호현낙선, 현명하고 선한 사람을 따르는 것보다 더한 선은 천하에 없다는 뜻이다.

▶“서예는 음악, 미술보다도 밀도높은 인성교육이다”=“요새는 학생들이 서예를 배우러 안 와. 인성교육에는 서예가 최고인데, 그 인성교육을 포기하니 나라가 엉망진창이 돼 가는 거야.”

그는 동양문화권인 한국에서 동양문화의 정점인 서예를 도외시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개탄했다. 부모들은 수능 공부하기도 벅찬 자식들에게 더 이상 한자공부를 시키거나 서예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예가 인성교육에서 반드시 필요한 걸까. 그는 작정한 듯 오랫동안 준비해 온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성경 구절, 불교의 법구경 구절, 유교의 명심보감, 사서삼경…. 여기서 좋은 문구들을 추려서 반복해서 보고 쓰는 것이 서예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인성교육이 되는 거지. 또 글씨를 쓸 때는 호흡조절이라는 것을 하지.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할 때의 효과가 글씨 쓸 때도 나타나는 거야.” 

좌금우서, 왼편에 거문고를 두고 오른편에 책을 펴놓고 성현을 본받으려 한다는 뜻으로, 독서와 탁금을 즐기는 성현을 본받으려는 마음을 담았다.

이번 산수전에서 선보일 작품들 중 좋은 글귀를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예서체로 쓴 ‘호현낙선(好賢樂善)’과 전서체로 쓴 ‘좌금우서(左琴右書)’를 꼽았다.

호현낙선, 조선 후기 사상의학을 확립한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 나오는 ‘호현낙선 천하지대약(好賢樂善 天下之大藥)’에서 따온 네 글자다. 현명하고 선한 사람을 따르는 것보다 더한 선은 천하에 없다는 뜻이다.

좌금우서 글씨 밑에는 ‘왼편에 거문고 놔두니 오른편은 고서 펴놓고 성현을 본받으려 하네’라는 한글 주석이 달렸다. 독서와 탁금을 즐기는 성현을 본받으려는 마음을 담았다. 두 작품 모두 송천의 최근 글씨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송천은 한자와 한글을 병용한 작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자를 어려워하는 요즘 세대들이 서예전을 어렵게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서삼경과 불교 법구경, 그리고 성경에서 뽑은 문구들을 해서, 행서, 전서 등 다양한 서체로 쓴 작품 130여점을 내건다. 특히 2천700여자의 글씨가 적힌 노산 이은상의 ‘조국강산’은 산수를 맞은 명필의 호방한 필체를 느낄 수 있는 대작이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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