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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 포럼-이호철> 장기·모험투자는 자본시장에서…
“한국은 아직도 1997년 금융위기의 교훈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지난 여름 한국을 방문한 국제통화기금(IMF) 부국장이 던진 말이다. 그는 ‘아시아 금융의 미래’라는 프로젝트를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금융실태를 파악 중이었다. 구미, 아시아 등 세계 각국의 금융시스템에 해박한 그는 한국 금융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답했다.

1997년 초부터 경기 부진으로 기업들이 연이어 도산하자 우리 은행들의 부실자산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자 외국계 은행들이 급속히 대출을 걷어들이면서 국내 금융기관들은 부도위기에 몰리고 외환보유고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환율이 폭등했다. 이것이 1997년 금융위기의 전말이다. 당시 받을 채권을 갖고 있던 은행들마저 부도위기를 맞은 것은 ‘자금의 만기 불일치’ 때문이었다. 우리 금융기관이 외국계 은행들로부터 단기자금을 빌려와 기업에게 장기로 빌려준 것이 문제였다.

1997년 금융위기의 주요 교훈 중 하나는 은행과 자본시장의 역할을 명확히 해서 ‘자금의 만기 불일치’를 없애라는 것이다. 은행은 고객들의 예금을 모아 기업에게 단기운영자금을 빌려 주는 곳이다. 반면 장기 투자는 주식 또는 채권을 발행하는 자본시장의 역할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은행의 재무 상태를 높이기 위해 BIS비율을 높이고 외환보유고를 튼튼히 쌓아놓고 있어 외형상으로는 견실해 보인다. 그러나 은행과 자본시장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요즘, 우리나라는 경제 활력을 되찾자며 은행들에게 장기, 모험투자를 늘리라고 압박한다. 은행은 단기로 자금을 운영하는 기관이며 장기 설비투자, 모험투자는 자본시장의 역할인데도 이런 말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서구의 산업 성장 역사는 주식회사 제도의 발달과 궤를 같이한다. 주식회사는 주식의 상장과 증자를 통해 모은 거대 모험 자본으로 대규모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에디슨에 의한 전기 혁명, 자동차 산업의 급성장에서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산업혁신 발전의 배경에는 거대 모험자본을 조달해 준 자본시장이 있었다. 또 서구는 기업 뿐 아니라 철도, 운하,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도 대부분 자본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벤처기업 초기의 창업단계에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까지 엔젤투자나 벤처투자가 필요하다. 이런 초기 단계에서 투자자들을 모을 수 있는 것도 이들이 언젠가는 기업 상장을 통해 큰 투자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1960~7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은행을 통해 기업들에게 장기설비자본을 공급해 주었다. 때문에 증권업에 비해 은행업이 비대해졌다. 이런 은행 차입형태에 대해 금융 패러다임의 변화를 명확히 경고해 준 것이 1997년 금융위기였다.

우리나라는 은행업의 규모가 증권업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다. 자본시장의 주역인 투자은행(IB)이 예금과 일반 대출을 담당하는 상업은행 보다 큰 미국과 대비된다. 이제 더 이상 은행권에 신성장 동력을 육성하기 위한 장기·모험투자를 늘리라는 주문을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자본시장의 역할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하루바삐 자본시장 육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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