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파주)=배두헌 기자]“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1943년 10월, 윈스턴 처칠이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 국회의사당을 재건하기로 약속하면서 한 말이다.
조화롭지 못한 도시 디자인, 너절한 건물들, 난잡한 디자인의 간판들은 격변의 한국 현대사를 보여주지만 자본을 등에 업은 권위적 건축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고자 경쟁하듯 올라서고 있다.
하지만 한국 건축의 거장 민현식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고개를 젓는다. 민 교수는 “권력이 주도한 건축은 사람들을 관객의 입장에 머물게 한다”면서 “나는 ‘자연의 모습이 집 속에 동화되는 건축’에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자연이 집 속에 동화되는 건축, 그 아름다운 디자인을 예전부터 실현하면서 건축물이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는 곳이 있다. ‘지혜의 도시’ 파주출판도시다. 지난 23일, 복잡한 서울을 뒤로하고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건축 전시장인 파주출판도시로 향했다.
▶삶을 담는 건축,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국내 출판인들이 모여 출판문화산업단지 추진위원회를 발족한 것은 지난 1989년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2014년 파주출판도시엔 출판사, 인쇄사, 제본사 등 수많은 출판관련 업체가 저마다의 스토리를 지닌 독특한 건축물 속에 들어섰고 강한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도시 곳곳에 북카페와 갤러리, 공연장 등 문화공간이 들어선 데 이어 최근 ‘지혜의 숲’ 도서관이 문을 열면서 파주출판도시는 관광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이 도시를 디자인한 사람들은 건물 하나하나의 모습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거나 방문하는 사람들의 삶을 담는 공간, 지식과 지혜가 소통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도시’를 표방하면서 주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려 노력했다. 이곳에 모인 건축가들은 평범한 도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디자인했다.
건물을 배치하고 채우기에 앞서 ‘비움’을 먼저 계획한 것도 특징이었다. 수많은 녹지들, 건물과 건물의 사이공간 등 ‘확정되지 않은 공간’을 남겨놓은 것이 바로 ‘비움’의 미학이었다. ‘공동성의 추구’를 목표로 자연 환경은 물론 주변 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서로 약간의 양보를 감내했다. 그렇게 파주출판도시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 건축계가 주목하는 공간이 됐다.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세계 건축물’ 들녘=마크 어빙이 쓴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세계 건축 1001>에서 선정한 국내의 현대 건축물은 단 2곳이다. 한 곳은 파주 헤이리마을의 건축박물관이고 나머지 한 곳이 바로 출판도시의 ‘들녘’ 사옥이다.
들녘 사옥은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결코 크지 않다. 이 건물에 대해 어빙은 “전망과 구조 사이, 뒤쪽과 앞쪽 높이 사이에 대화가 소통되도록 했다는 점이 독창적이다”고 소개한다.
이 건물은 정면을 기준으로 왼쪽면은 콘크리트로, 오른쪽 면은 목재로 만들어졌다. 왼쪽은 차갑고, 오른쪽은 따뜻한 대조적인 느낌이 마치 두 개의 건물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준다.
내부 디자인도 건물의 기하학적 특징을 적용했다. 각각의 층마다 테라스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어 건물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층마다 달라진다. 어느 쪽을 봐도 울긋불긋한 가을 단풍과 자연이 한눈에 들어온다.
런던 올림픽 주 경기장을 설계한 스페인 출신 건축가 알레한드로 자에라 폴로가 이끄는 건축 그룹 F.O.A와 국내 건축가 김영준이 공동으로 디자인한 이 건축물은 2006년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의 국제 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과연 디자인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2006년 봄부터 매일같이 들녘 사무실로 출퇴근을 해온 김상진(38) 씨는 “여기서 뮤직비디오나 광고 촬영 뿐아니라 일반인 관광객들도 자주 찾아와 사진을 찍어갈 정도”라며 자랑스런 표정을 짓는다.
실제 건물 내부에서의 생활이 궁금했다. 그는 “내부 디자인도 시원시원하다. 실내 천장이 굉장히 높아 고개를 들었을때 시야가 탁 트여 답답하지 않고 좋다”면서 “일하면서 생기는 우울함도 따뜻한 햇빛을 받으면 아무래도 좀 덜해진다”고 대답했다.
입사 2년차 디자이너 김세린(27ㆍ여) 씨 역시 건물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건물의 디자인을 보고 한눈에 반해 입사를 결심했다는 그녀는 “이 건물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 같다.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거나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쉴 공간이 많아 질리지 않고 밖으로 보이는 자연이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다.
각 층마다 길게 뻗은 긴 테라스와 4층의 아늑한 다락방, 심지어 지하 공간까지 다 좋다는 그녀는 “출근길이 멀어 좀 힘들지만 아침마다 회사에 들어서며 건물을 볼 때마다 행복하고 ‘힘들어도 해야지’라는 생각이 든다”며 “(건물이) 잘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라고 웃었다.
인간과 환경을 위한 디자인, 건강한 삶을 만드는 최고의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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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명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