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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혀진 민가협 회원들의 ‘21년째 눈물’…”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할 때 가장 가슴 아파”
-1993년부터 지속된 ‘양심수 석방 집회’ 1000회 넘겨
-조순덕 민가협 상임의장 “우리도 평범한 엄마였지만…”



[헤럴드경제=박혜림 기자]“세상에 어느 엄마가 자식이 감옥에 있는데 두 손 놓고 있을까. 자식같은 양심수들이 감옥에 남아있으니, 다들 이렇게 오랜 시간 열정을 갖고 집회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난 23일 오후 2시 보라색 두건을 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모여 ‘양심수 석방,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1001번째 집회를 열었다. 지난 1993년 9월23일부터 매주 목요일이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곳 탑곱공원에 모였으니, 벌써 21년째다.

첫 집회가 열린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연말까지만 모이면 국가보안법이나 양심수 문제가 모두 해결되리라 믿었던 그들이다. 그랬던 집회는 어느덧 1000번을 지나 새로운 1번째를 맞이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김명섭 기자 msiron@heraldcorp.com

조순덕(65ㆍ여ㆍ사진) 민가협 상임의장은 “자식이 아닌 남편이 감옥에 수감됐다면 이렇게까지 집회가 오래 지속되진 못했을 것”이라며 지난 세월을 돌이켰다.

‘뉘집 아들’이 감옥 안의 감옥이라는 ‘징벌방’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누구보다 발벗고 나선 것이 ‘어머니’들이었다. 교도소장에 항의해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독방에 수감된 양심수들을 환한 방으로 옮겼다. 겨울이면 난로불 하나 켜놓고 며칠간 버티며 싸우기도 했다. 조 상임의장은 “자식이 감옥에 있는데 눈에 뭐가 들어오겠나”고 반문하며 “화장은 커녕 산발을 하고 다니기 일쑤였다”고 했다. 정의나 신념보다도 자식에 대한 모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보법 위반으로 수감된 자식을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세상의 차가운 시선도 어머니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


생면부지 타인은 물론 피로 맺어진 가족조차 곱잖게 이들을 바라봤다. 벙어리 냉가슴 앓으며 타들어가는 속을 혼자 삭여야만 했다. 그랬기에 비슷한 처지인 ‘어머니’들은 자연스레 서로 의지하고 뭉치게 됐다. 내 자식이 풀려나도 ‘내 자식 같은 남의 자식’을 위해 함께 싸웠다. 그 결과 1000여명이던 양심수는 이제 39명으로 줄었다. 비전향장기수 인권문제도 공론의 장으로 끌어왔다.

경찰들에 이끌려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방패로 찍히기를 벌써 수십년. 지난한 싸움에 어디 한 군데 몸이 성한 곳이 없다.

조 상임의장은 얼마전 성치 않은 윗니 7개를 뽑고 임시 치아를 박았다. 최루탄에 수차례 노출되며 눈 상태가 나빠진 어머니도 있다. 게다가 어머니들 대다수가 70대의 고령에 접어들며 이제는 목요집회에 계속 나오는 이도 10명에 불과하다. 그래도 어머니들은 국보법 폐지와 양심수가 석방되는 그 날까지, 마지막 1명이 남더라도 끝까지 집회를 이어간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런 조 상임의장을 비롯한 어머니들을 힘들게 하는 건 육체적 고통이 아닌 정신적 고통이다.

예나 지금이나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하고 있노라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고 “김일성 만나러 가지, 왜 여기 있냐”고 야유하는 이들이 있다.

조 상임의장은 “자식들이 수감되기 전에는 다들 살림만 했던 평범한 어머니였다”며 “남들이 내 자식을 빨갱이라 손가락질하니 빨갱이 부모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은, 언제든 보고 싶으면 얼굴 볼 수 있는 양심수를 자녀로 둔 어머니들보다, 자식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세월호 어머니들을 보며 더 가슴이 아프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rim@heraldcorp.com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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