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준규 기자] “징하게 비싸네, 조금만 싸게 해주소.”
“아따 할매 저쪽 가게 가봐도 여그랑 값은 똑같아요.”
초가을의 볕이 조금은 뜨거웠던 지난 14일.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에 있는 ‘신중앙시장’은 평일 오전부터 가격을 흥정하는 주민들과 물건을 나르는 상인들로 시장은 활기찬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이 시장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되고 장사 안 되는’ 이미지를 가진 재래시장이었다. 시장을 둘러싼 상권도 쇠퇴했다. 800여 곳이 넘는 점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연간 매출 4000만원 미만의 영세 점포들이었다. 100곳 가까운 점포는 빈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하지만 2011년부터 올해 초까지 진행된 전주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통해 ‘디자인’을 만났고 새 얼굴을 얻었다.
분위기가 바뀐 곳은 중앙동 일대 상권만이 아니다. 인근 노송동 일대 주거지역도 노후한 이미지를 벗어냈다. 상업지구ㆍ주거지구를 합쳐 약 33만㎡에 달하는 이 지역은 과거 전주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하지만 지난 80년대 도시계획과 시 곳곳에서 개발사업이 진행됐다. 시의 동서를 잇는 기린대로와 남북을 잇는 충경로가 생기면서 기존 상권이 갈라지고 축소됐다. 젊고 활력 넘치는 도심의 역할도 신시가지에 빼앗겼다. 전주가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다.
지난 2010년 도시재생 테스트베트(Test Bed)로 선정된 전주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도움을 받아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2006부터 LH가 진행한 도시재생 기본연구를 현장에 적용하는 과정이었다. 전주가 일종의 ‘실험실’이 된 셈이다. 전주 방문에는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전북대 곽희종 박사와 고석진 LH 도시재생지원단 차장이 동행했다.
▶디자인 하나로 재래시장이 ‘아케이드형 상가’로 변신
신중앙시장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건 시장의 디자인이다. 시장은 기본적으로 50m 길이의 통로가 네 갈래로 나 있고, 각 통로에 점포와 매대가 펼쳐진 모습을 하고 있다. 반원형의 천장이 지붕을 이루고 있는 각 통로는 시장의 중심에서 하나로 만난다.
시장 디자인의 백미는 돔 형태의 중앙광장이다. ‘문화광장’으로 불리는 곳이다. 덕분에 이 시장은 어느 외국 도시의 잘 꾸며진 아케이드를 연상하게 한다. 주변 대형 마트에 밀려 손님이 급감하며 어려움을 겪었던 과거 재래시장을 되살리기 위한 디자인이다.
실제 신중앙시장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문화광장 돔 지붕을 도화지삼아 레이저쇼가 열리기도 한다.
북쪽으로 시장을 벗어나 노송천을 따라 걷다보면 3층짜리 하얀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닥터스 빌딩’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건물은 과거 전주를 대표하는 예식장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주변 상권이 쇠퇴하면서 이곳을 찾는 신혼부부들도 줄었다.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던 이 건물은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보존되면서 ‘빈 점포 신탁사업’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곽 박사는 “장기간 비어있는 점포를 찾아내 창업을 준비중인 사업자에게 소개해 주고 창업 컨설팅까지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빈 공간으로 방치됐던 1층에는 ‘롱 블랙 커피’ 카페가 들어섰고, 지하에는 ‘다미약품’이란 의료약품 업체가 자리잡았다. 버려졌던 공장 건물을 식료품 매장으로 리모델링해 뉴욕의 명소가 된 ‘첼시마켓’에 비견되는 사례다. 역사와 원형을 보존하는 도시재생의 가치가 잘 구현된 곳이다.
▶디자인으로, 주민들 관계까지 ‘Re-Design’=전주의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진행된 주거지역인 노송동 일대는 ‘숨겨진 동네’다. 전주시청을 비롯해 높은 오피스 빌딩이 늘어선 기린대로에서 불과 50m 거리에 있지만 대로쪽에서는 건물에 시야가 가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950여 가구가 사는 이곳은 과거엔 쓰레기가 아무렇지 않게 버려져 있고 빈 집이나 폐가가 산재했던 동네다. 특히 저소득층이 많고 공동체적 교류가 적었다.
곽희종 교수는 “도시재생 사업이 외부 관광객을 늘리고, 외지인이 이쪽으로 들어와서 살게 만드는 목적으로 이해되곤 하는데 어디선가 사람을 데려오면 다른 어딘가는 비어버리는 문제가 있다”며 “전주 주거지역 도시재생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게 만들자는 목적으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대단한 디자인 작업이 필요하진 않았다. 부족한 가로등을 더 세우고, 쓰레기가 가득했던 땅에 꽃과 풀을 심거나 폐가를 치우고 그 자리를 작은 텃밭을 만드는 것, 또 주민들이 쉴 수 있는 벤치나 운동공간을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주민들은 새로 조성된 텃밭에 나와 상추나 파, 깻잎을 함께 키우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27명이 5만~10만원씩 출자한 돈으로 마을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지금도 출자하겠다고 나서는 주민들의 문의가 끊이질 않는다.
노송동의 도시재생협동조합을 이끌고 있는 한복순 이사장은 “마을 사람들이 도시재생 사업으로 만들어진 세 곳의 텃밭에서 각종 채소를 키워 팔아 대단하진 않지만 경제적 도움을 받는다”며 “도시재생 사업을 거치면서 마을 주민들 사이에 교류가 많아지고 유대감도 전보다 훨씬 끈끈해졌다”고 웃으며 말했다.
단절됐던 주민들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마을에 적용된 소소한 디자인이 주민 관계를 ‘리 디자인’한 셈이다.
곽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이나 배려심은 도시재생이 발달한 외국 사람들에 비해 좋기 때문에 기회만 마련해주면 사이좋게 어울려서 지낼 수 있다”며 “도시재생 과정에서 시도한 작은 디자인 덕분에 주민들의 관계가 끈끈하게 디자인된 사례를 ‘한국형 도시재생 모델’로 키울 수 있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