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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리포트] 愛 썸타? 타!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썸’학 개론
사귐의 분명함보다 그 즈음의 흐릿함…
연애에 이르기까지 애매모호한 관계…
구속 싫어하는 2030세대 新연애풍속도


다음 상황을 하나의 키워드로 표현해보자.

2014년 10월, 여자와 남자는 같은 커피숍에서 일한다. 늦은 시간 퇴근때면 항상 남자가 여자를 데려다준다. 각자 집에 가서도 둘만의 ‘카톡(카카오톡) 속삭임’은 이어진다. 피곤해진 여자는 남자에게 자장가를 요청하고 남자는 목소리를 깔면서 “잘 자라 우리 아가~”를 반복한다. 쉬는 날엔 영화를 같이 보고 쇼핑도 같이 한다. 하지만 둘다 사귀자는 말을 기대하거나 할 생각이 없다. 그저 설레임과 편안함이 좋다. 이 둘은 어떤 관계일까?

만약 ‘사랑과 우정사이’를 떠올렸다면 당신은 80~90년대 학번이 틀림없다. 1992년 그룹 ‘피노키오’가 히트시킨 ‘사랑과 우정사이’를 부르면서 말이다. 노래 가사를 되짚어보면 노랫속 남자와 여자는 모호한 관계에 괴로워하며 결국 이별을 택한다. 따라서 정답이 아니다.


혹시 ‘밀당’(밀고 당기기)이란 키워드를 생각했다면 당신은 밀레니엄(2000년 이후) 학번이다. 밀당 후엔 사랑하는 연인관계를 꿈꿀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정답은 아니다. ‘2014년’을 힌트로 생각해보라. 정답은 ‘썸’이다.

‘요즘 따라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니 꺼인 듯 니 꺼 아닌 니 꺼 같은 나/이게 무슨 사이인건지/사실 헷갈려 무뚝뚝하게 굴지마/때론 친구 같다는 말이/괜히 요즘 난 듣기 싫어졌어’

연애풍속도가 변하고 있다. 연인 대신 ‘썸남썸녀’가, 사랑 대신 ‘썸’을 탄다. 썸은 단연 올해 최고의 유행어다. 썸은 남녀 간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썸씽(something)’에서 파생돼 다양한 신조어로 이어지고 있다. ‘썸을 타다(관심 가는 이성과 잘돼 가다)’, ‘썸남ㆍ썸녀(썸 관계에 있는 남성과 여성)’가 대표적이다.

‘관심 가는 이성과 잘 돼가는 감정’이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했지만 위 노랫말 만큼 썸을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최근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정기고와 소유의 ‘썸’이란 노래다. 이 노랫말로 썸을 정리하면 무슨 사이인지 헷갈린다는 연애의 전초전, 혹은 연애에 이르기까지 애매모호한 불확실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썸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연애 방식을 보여준다. 요즘 2030세대는 ‘사귐’의 분명한 관계보다 그 즈음의 흐릿함, 모호함을 즐긴다. 한마디로 썸을 탄다.

썸을 다룬 문화콘텐츠는 단연 인기 만점이다. 썸을 타다 한쪽이 적극적으로 나와 연애에 성공한 커플의 이야기를 담은 웹툰 ‘썸툰’은 누리꾼들 사이에 ‘공상과학 판타지물’로 자리 잡았고, 케이블방송 프로그램인 ‘시즌2 텍스트앳’, ‘그린라이트’ 등에서 소개되는 썸남썸녀스토리는 연일 화제거리다.

사실 썸이 올해 갑자기 등장한 용어는 아니다. 남녀관계에서 ‘케미스트리(감정)’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생긴 모든 흐릿한 감정, 또는 그런 상태가 2014년에 와서 썸이란 단어로 선명해졌다. 계속 있었던 감정이지만 분명 차이는 있다. 과거 세대가 더 높은 관계로 가기 위한 썸이었다면 현재의 썸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거나 단순한 썸에서 끝나버린다는 점에서 다르다.


썸의 열풍은 사회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결혼을 포기하고 구속과 책임감을 두려워하는 젊은층이 늘고 있다. 이들에게 사랑은 감정 소모와 경제적 손실로 치부될 뿐이다. 즐기더라도 절대 모험은 하지 않는다. 한창 연애할 20대지만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검증된 짝을 찾고 공신력 있는 소개팅 모바일 어플리캐이션(앱)을 통해 상대를 고른다.

지난 2012년 연애를 끝으로 썸 행렬에 들어선 직장인 박상호(29ㆍ가명)씨는 “썸녀가 여친(여자친구)이 되면 늘 연락을 하며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다”면서 “썸녀에게는 바빠서 연락을 잘 못해도 크게 미안할 필요가 없고 만나고 싶을 때만 만날 수 있어서 만족한다. 속앓이를 안해도 되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김선영(22ㆍ여)씨는 “서로 ‘니꺼 내꺼’ 할때보다 모호한 관계가 더 짜릿하다”면서 “집착하지 않으니깐 감정 소모도 없다. 내 일을 하면서 연애 감정도 느껴서 좋다”고 말했다.

연애보다 가벼운 관계지만 상처는 남는다. ‘썸남썸녀’ 둘 중 한명이라도 썸의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관계가 위태로워진다. 경계점 역시 모호해 가볍게 시작된 관계가 더 큰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연애상담 온라인게시판마다 “이게 썸인가요, 사랑인가요?”라고 묻는 썸남썸녀의 심정만 봐도 썸을 가벼운 관계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유행처럼 번지는 썸 열풍에 대해 전문가들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진정한 관계의 중요성이 간과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썸이 근본적인 건 해소해주지 않는다”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는 이러한 틀 안에서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혜진 자/hhj6386@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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