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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남 첫날부터 함께 살게된 젊은 남녀
타락
/구효서 지음/현대문학
중견 소설가 구효서의 새 장편소설 ‘타락’에서 주인공들은 어디론가 떠나거나, 떠남을 줄곧 바라지만, 결국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아니, 지금 당도한 이곳이 그토록 떠나 이르고자 했던 바로 거기가 아님을 깨닫는다. 

애초부터 떠남이 불가능했으니‘돌아봄’도 필요없었다. 죽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 명부로 떠났다가 함께 귀환하던 중 신의 경고를 어디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던 그리스신화 속 시인 오르페우스같은 비극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서사였다. 

‘타락’의 두 연인은 희극이든 비극이든 꿈꾸지만, 이룰수는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며,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낙원으로서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였다. 낙원이 애초부터 부재했으니 실낙원도 없으며, 아담과 하와는 타락조차 불가능했다. 제목 ‘타락’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상황이고 관계없으며 희망이었다.

‘타락’은 이국땅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바로 첫날부터 함께 살게 된 젊은 두 남녀의 이야기다. 

아마도 영어를 쓰고 국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영국일 낯선 땅에서 ‘산’은 유학 중이었고, ‘이니’는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쳐왔다. 두 남녀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금, 여기, 당신’만을 끊임없이 탐하고 확인한다. 일상과 풍경, 두 남녀의 몸짓에 대한 극사실적인 묘사가 반복되는 가운데, ‘이니’를 잡으러 온 ‘히만’, ‘산’을 만나러 온 ‘윤지’가 등장한다. ‘이니’를 잡으러 온 ‘히만’은 자신의 전부인 ‘성허’의 부탁을 수행 중이었고, ‘윤지’의 영국행은 산의 아버지인 ‘하’의 의중때문이었다. 

이국 땅의 한 벽돌집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산과 이니는 ‘지금, 여기’가 영원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서로를 묶지만, 히만과 윤지의 등장, 그리고 산과이니를 위협하던 옆집 노파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풍경으로 시작해서 행위로 이어지고, 반복 변주되는 풍경과 행위 속에서 인물간 관계를 드러내는 글은 꽤 진중한 독법을 요구하지만, 점점 살이 붙고 구조를 갖춰가는 서사의 골격은 뜻밖에 드라마틱하다.

주인공들은 먼저 행위하고, 그 다음에서야 그 행위의 목적과 이유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불안이며, 그것은 곧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지독한 절망이다.

구효서는 1987년 등단해 28년째를 맞았으며 30권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나는 내가 전에 어떤 작가였는지 잊고 싶은가 보다”고 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신화적 상상력에 현대인들의 심리를 투영한 ‘타락’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중견 작가이자, 늘 ‘지금, 여기’와 다른 새로움을 숙명으로 짊어진 예술가로서의 존재증명이다.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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