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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벽한 자기 파멸에의 매혹, 필립 로스 장편 ‘전락’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무대에서 단 한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60대의 유명 연극 배우가 어느날 갑자기, 평생 가능했으며 평생 가장 잘 해왔던 바로 그 일, 연기가 더이상 불가능해졌음을 깨닫는다. 연기에 대한 재능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스스로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다. 아내마저 떠나버리고 완벽하게 홀로 유폐된 생활을 하던 그에게 어느날 오래 전 알았던 동료 부부의 딸이 찾아온다. 예순 다섯 살의 남자와 마흔 살의 여인은 연인이 되고, 주인공인 연극배우는 다시 한번 생의 의지를 다진다. 그러나 전락으로부터의 ‘완벽한 복귀’가 도래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완벽한 파멸’이 찾아온다.

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필립 로스가 일흔 여섯의 나이에 펴낸 서른번째 작품인 장편소설 ‘전락’(박범수 옮김, 문학동네)은 노년에 문득 최악의 위기에 빠져 버린 연극배우의 심리드라마이자, 상처받은 두 남녀가 이루는 멜로드라마다. 남자는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연기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으며, 여자는 레즈비언이었으나 과거의 연인이 ‘남성’이 되기로 선언하면서 역시 ‘존재’를 부정당했다. 남자는 스스로가 지배해왔던 무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으나 그 자리를 새로운 연인으로 대체하고, 여자는 별안간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 혹은 양성애자로 변신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려 한다. 그러나 두 인물 사이의 이루어졌던 ‘거래’로서의 합일은 짧은 행복으로 끝났고, 만남처럼 결별의 계기 또한 무심코, 장난스럽게 찾아왔다. 다시 찾은 행복의 정점에서 마지막 결별과 파멸의 결정적인 계기를 주인공 스스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드라마는 자신의 최후 연기로서 ‘완벽한 자기 파멸’에 매혹된 주인공의 무의식적 욕망이 써가는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와 같은 문장에서 주인공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 소설 전체를 “살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죽고 싶은 남자”의 연극으로 도치시켜 읽어도 무방하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동정과 연민없이 냉소를 섞어 인생의 비정함을 통찰한 문장들이 차라리 통쾌하다.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인간과 관계에 근원적으로 내재한 욕망의 이율배반을 통렬하게 그려냈다. 전미도서상과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각각 2번 수상하고 펜/포크너 상을 3번 수상했다는 화려한 필립 로스의 경력이 괜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사건의 진상은 콘스탄틴 가브릴로비치가 총으로 스스로를 쏘았다는 것이다”라는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 속 대사를 인용한 마지막의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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