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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인물의 이미지 통렬하게 깬 이면의 기록들...‘흔적의 역사’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정조 하면 개혁 이미지가 연상되고, 세종 하면 한글창제와 애민(愛民)이 떠오른다. 실학자 박제가는 균형잡힌 중상주의 경영학자라는 느낌이고, 다산 정약용은 어질고 샤프한 테크노크라트라는 인상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정조는 중하급 관리가 챙길 재해대책본부 상황실 일을 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었고, 세종은 조선최대의 조말생 뇌물게이트와 왕실 동성애 사건에다 60건의 능지처참을 명할 정도의 숱한 사건사고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 박제가는 반골에다 우리의 전통 발효식품인 장(醬) 혐오자였고, 정약용은 주량을 알기 힘들 정도로 술이 셌다.

역사가 ‘이미지’ 라면 허탈하다. 이미지를 전부로 믿으며 역사 공부를 해온 국민들은 온전한 역사를 모를 가능성이 높다. 역사의 진면목은 이미지 뒤에 감춰진 흔적들을 찾아낼때 드러난다.

1403년에도 ‘세월호’,‘페리호’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현물로 받은 세금을 운반하던 조운선 34척이 침몰한 것이다. 참변을 보고받은 태종이 피해상황을 캐물었지만 주무 관리는 “쌀은 1만여 석 되는 것 같고, (희생된) 사람은 1000여 명쯤 됩니다”라고 얼버무린다. 태종은 “이 모든 책임은 과인에게 있다”라고 장탄식한 뒤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출항일(5월 5일)은 수사일(受死日ㆍ대흉일)이고 풍랑 마저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울 수 없었는데….“라고 애통해 했다.

그로부터 380년후인 1783년 전국에 재해가 나자 정조는 자기 처소 동서 벽면에 ‘상황판’을 걸어놓고는 피해지역을 3등급으로 나눈뒤 수령 이름과 세금경감 및 구휼 조목 등을 써놓고, 한 가지 일을 처리할 때마다 기록했다. 임금이 직접 재해대책본부 상황실을 꾸린 것이다. 정조는 “재해를 구하고 피해를 입은 백성을 돌보는 것은 특히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은 늘 근심이 많았다. 집권한지 8년째 되던 1426년 선왕과 자신의 재임기를 이어가며 병조판서 등 요직을 맡았던 조말생이 ‘사형’의 양형기준을 넘는 뇌물을 받았지만 선처하느라 중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개혁하랴, 불만 막으랴, 집안문제 처리하랴 마음고생이 심하던 차에 1436년 10월26일에는 도승지와 동부승지만을 불러 고민을 토로한다. “요사이 괴이한 일이 있다. 말하기도 수치스럽지만, 세자빈이 궁궐의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구나.” 며느리의 동성애스캔들 마저 성군 세종을 괴롭혔던 것이다.

이처럼 ‘이미지의 장막’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역사의 빈칸은 경향신문에서 역사 문화유산을 오랜기간 취재해온 역사칼럼니스트 이기환이 ‘홍재전서’ 등 170여본의 기록물을 찾아 보면서 집대성한 ‘흔적의 역사’라는 저서를 통해 메꿔주었다. ‘역사의 민낯’을 들여다볼 창을 열어준 것이다.

이기환의 고증을 통해 중상주의 경영학자 박제가의 성정을 보자. “너무 더러워 입에도 댈 수 없는 음식이 바로 장이다. 삶은 콩을 맨발로 밟아대는데 온몸의 땀이 발밑으로 떨어진다.(중략)구역질이 난다”, 박제가의 구역질은 조선 사회 전반의 구조적문제로 확대되면서 ‘중국 벤치마킹’이라는 과격한 중상주의로 귀결된다. 그의 후배 성해옹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상대를 반드시 꺾으려하는 바람에 쌓인 비방이 크고 요란한 인물’로 묘사한다.

이기환이 메꿔주는 역사의 빈곳은 제목만 보아도 꽤 시원하게 채워진다. 이를테면, ▷암행어사, “성접대까지 받았지만….” ▷‘침 좀 뱉었던’ 힙합 전사들의 18세기 한양 풍경 ▷“노총각·노처녀를 구제하라!” 역사 속 솔로대첩 ▷율곡도 다산도 당한 신입생환영회 등이다.

연산군 조차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라고 했다. 유리한 기록만을 골라 사서에 담는 것은 반칙이다. 허상의 이면을 차지하는 ‘흔적’은 사회발전의 동력이 될 우리의 인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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