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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 창조적 7막 인생 하태형 현대경제연구원장 “기회 주어졌을 때 단 한번도 물러선 적이 없다”
‘持滿定傾節事(지만정경절사)’

서울 종로구 연지동 현대그룹빌딩 서관 3층에 위치한 현대경제연구원. 하태형 원장을 만나러 접견실에 들어서자 이 글귀가 큼지막히 쓰인 대형 서판이 단번에시선을 사로잡는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와신상담’의 주인공 월왕(越王) 구천이 위기 순간 자결하려 하자 그의 참모 범려가 만류하면서 했던 말이다. 뜻을 풀자면 ‘항상 마음을 벅차게 하고있는 자는 하늘의 도움을 얻고, 기울어 가는 것을 바로 잡는 자는 백성의 도움을 받을 것이며, 일을 절제하는 자는 땅의 도움을 입게 된다’는 내용이다.

하 원장이 취임한 지난 4월 유명 서예가 하석(何石) 박원규 선생이 직접 작업해 선물한 작품이라고 한다. 하 원장은 “하석 선생께서 구천과 같은 자세로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라는 의미로 하사해주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1幕. ‘풍운의 꿈’ 품고 현대와의 첫 인연

하 원장은 대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선 경영학을 전공했다. 1982년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택한 직장은 다름 아닌 현대그룹(종합기획실)이었다. 하 원장은 당시 기억을 회고하며 “그룹에 처음 입사해 연수를 받았던 곳이 현대인재개발원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 연구원장으로 와보니 개발원이 우리 연구원 산하에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고 말했다.

입사연수 내용이 정주영 명예회장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현대 하면 정주영 이름 석자가 떠오르는 것처럼 정 회장님의 리더십과 그가 어떤 불굴의 의지로 기업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배운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다른 중견기업들에게도 ‘정주영 학(學)’을 전수하는 기회를 가져보는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직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꿈꾸고 경험했지만 단 한번도 ‘현대맨’임을 잊은적이 없다. 미국 유학생활중에도, 금융투자업계에 몸 담았을때도, 대학 강단에 섰을때도 그랬다. 마치 연어의 회귀처럼 오랜 시간 이 곳 저 곳을 누비다 현대로 돌아온 하태형 현대경제연구원장에게서 ‘현대의 DNA’가 오롯이 녹아있는 듯 보였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2幕. 희비 엇갈린 현대중공업 시절

입사와 동시에 산학협동의 일환으로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에서 석사(경영학) 과정에 들어갔고 학위수료 후 1984년에 현대중공업으로 발령받았다. 석사 과정에서 배운 파생상품 기법을 현대중공업에 오자마자 바로 써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회사가 어려웠는데 리비아에서 배 값으로 돈 대신 석유를 주겠다고 해서 난처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엄용기 부사장이 방법을 마련해보라고 해서 제가 파생상품으로 유가를 픽스(고정)시킬 수 있다고 제안했고, 결국 계약을 성사시켜 주목을 받았죠.”

현대중공업에서 3년이 지나던 1987년 현대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노사분쟁이 발생했다. 노조와의 대치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회사 생활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됐다고 한다. “고민을 많이 하다가 처음부터 생각하던 유학을 결심하고 떠나게 됐습니다.”



3幕. 다시 펼친 ‘유학의 꿈’

공교롭게도 미국행을 택한 그 해가 뉴욕 주가의 대폭락 사태인 ‘블랙 먼데이(Black Monday)’가 발생했을 때였다. 그래서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 대신 주립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공은 선박 수주 성사로 ‘재미’를 본 파생상품으로 정했다. 하 원장은 “현대중공업 시절 이번에는 한 싱가포르 해운사가 배값을 자기 주식으로 주겠다고 해서 결국 주식을 싱가포르 달러로 픽스해서 받았는데 이런 경험들이 파생상품을 공부하게 된 바탕이 됐다”고 전했다.

경북고 3학년때 경북여고를 다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8년 연애 끝에 결혼한 아내와 뱃속의 둘째 아들을 두고 1988년 홀로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는 “그땐 아내가 만삭이어서 혼자 갔는데 결국 첫째 녀석이 한국 나이로 네살에 돼서야 가족이 미국에 들어오게 됐다”며 “다시 얼마 있지 않아 귀국하는 바람에 맏아들이 적응에 큰 혼란을 겪었고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전했다.

첫째 지석(30)씨는 현재 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고 둘째 우석(26)씨는 서울대 공대를 나와 연세대 의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우석씨는 뇌(腦)과학 분야쪽에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4幕. ‘파생상품 1세대’ 그리고 97년 ‘눈물의 크리스마스’

뉴욕주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행을 결정한 그는 학교나 연구소가 아닌 금융쪽을 선택했다. 그때만 해도 금융투자시장이 별로 활성화되지 않았던 터라 국내에도 파생상품 기법을 전파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는 “보통 미국에서 박사를 하면 경제연구소나 학교로 가게되는데, 전공을 살리고 싶어 당시 파생상품쪽에 신경을 많이 쓰던 동양증권에 입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996년 6월 9일, 우리나라에 파생상품 시장이 처음 개장한 날로 기억합니다. 성공여부에 대해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에서 걱정이 많았는데, 당시 파생상품 거래제도를 수립하는데도 참여했고 실제 트레이딩에 대해 무수히 많은 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파생상품시장의 1세대로 불린다.

그러다 1년 후인 1997년에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졌다. 하 원장은 “199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새벽 1시가 넘도록 여의도 바닥을 돌아다니며 달러를 빌리러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외국계 금융컨설팅 회사의 한 임원이 한국에 금융위기가 터진다고 얘기해준 첫 한국인이 바로 하 원장이었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5幕. 투자자문사 대표로의 변신

돌이켜볼 때 변화나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을때 한번도 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으며 일단 해보자는 식으로 덤볐다고 했다.

2000년대 개막이 가까워질 즈음 파생상품을 전문으로 하는 투자자문사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금융쪽에 관심을 보이던 이수그룹과 합작해 보아스투자자문이란 회사를 설립했다. ‘보아스’란 이름은 성경에서 따왔다. 보아스는 ‘지혜의 왕’으로 불리는 솔로몬이 세운 성전 기둥 중 하나다.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자문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설립 12년만에 회사를 철수했다.

이 당시 한학에 빠져들게된다. 한학에 꽤 조예가 깊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하 원장은 시간이 나면 경제금융 아니면 한학을 공부해왔다고 했다.

한학과 관련해 서로 통하는 분이 바로 본인의 석사논문을 지도해 준 최광 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라고 소개했다. 하 원장은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직접 번역하고 진덕여왕의 상소문도 읽고 해석했다고 했다. 한학에 심취해보니 바로 옛 글 속에 경제의 모든 원리가 들어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6幕. 대학에서 현장을 가르치다

그때 마침 수원대에서 금융공학대학원 원장직 제안이 들어왔고 이를 수락하면서 변신을 거듭한다.

수원대 재직 시절 학부에서 한 학기에 4~5과목 정도를 맡았는데 인기 교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학 교수님들은 대부분 현장 경험이 없고, 반대로 금융기관에서 몸 담았던 인력이 대학으로 옮겨 강의하는 사례가 적습니다. 관피아니 뭐니 문제시되는 순혈주의도 미국 등 선진국처럼 업종간 벽을 허물고 넘나들다보면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공무원 제도에 대해선 “공무원은 규제를 강화하기보다는 감시ㆍ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며 “현장 전문가를 훨씬 더 많이 영입하고 공무원의 급여도 싱가포르처럼 높이는 방법을 써서라도 본연의 감시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7幕. 30년 돌아 다시 현대로…

대학에서의 2년을 뒤로 하고 지난 4월 현대경제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회 첫 직장으로 현대그룹에 발을 내디딘 후 돌고 돌아 30여년만에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셈이다.

“역대 연구원장은 연구원에서 한 길만 걸어오신 분들이 많은데, 우리 그룹이 처한 상황을 볼 때 저처럼 비교적 경험이 다양한 사람이 적합하다고 판단을 받은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 원장은 컨설팅과 e-러닝 부문에서 포화상태인 국내를 벗어나 중국 등 해외로의 진출 계획도 세우고 있다. 앞으로는 영어는 기본이고 지리적 특성상, 중국어까지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중국쪽에 상당한 관심이 있음을 내비쳤다.

우리 정부의 2기 경제팀에 대해서도 조언을 잊지 않았다. “결국 신뢰는 소통에서 나오기 때문에 정부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 국민에게 알리는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합니다. 국민의 귀에 쏙쏙 들어갈 수 있도록 정책 패키징을 잘하려는 노력도 물론 뒤따라야 합니다.”



대담=김형곤 금융투자부장/kimhg@heraldcorp.com

정리=서경원 기자/gil@heraldcorp.com




◆하태형 원장이 걸어온 길

*1958 대구 출생

*1982 서울대 경영학 학사

*1982 현대그룹 종합기획실 입사

*1984 한국과학기술원 경영과학 석사

*1992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1996 동양종합금융증권

*1998 LG선물

*2000 보아스투자자문 대표이사

*2012 수원대학교 금융공학대학원장

*2014.4~ 현대경제연구원 대표이사





◆박철수 수원과학대 총장이 본 하태형…“열정 대단하고 친화력 좋은 후배”

박철수 수원과학대 총장은 하태형 현대경제연구원장에 대해 “열정이 대단하고 친화력이 좋은 친구”라고 소개했다.

하 원장의 고등학교(대구 경북고) 3년 선배인 박 총장은 헤럴드경제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얼마 전 현대경제연구원장으로 간다고 해서 찾아왔길래 연구원 가면 아주 잘할 거라고 말해줬다”며 이같이 밝혔다.

박 총장은 하 원장이 199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학교나 연구소에 가지 않고 현업에 뛰어든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면 학계나 연구소로 취업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동양증권에 들어가 실물 현장에서 활약하는 걸 보고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박 총장과 하 원장은 경북고 출신 경영ㆍ경제계 인사들의 모임인 ‘경경회(慶經會)’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하 원장은 이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다.

박 총장은 하 원장이 수년간 금융경제권에서 실물경험이 풍부한데다 대학 강단에서도 3년 가까이 활동한 경력이 있어 경제연구원장으로서 우리나라 경제의 방향을 제시하거나 민간기업을 지원하는데 적격자라고 평가했다.

박 총장은 “민간연구소장 가운데 하 원장처럼 스펙이 다양한 인물도 없을 것”이라며 “기업, 금융, 학계 등 다방면에서의 현장 경험이 훌륭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하 원장의 출중한 한학 실력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 총장은 “하 원장이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데, 이런 점만 봐도 틀에 박히지 않은 창조적인 사람이란 점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고 전했다.

서경원 기자/gi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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