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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 카페> 소설가와 인류학자와 논픽션 작가의 아주 특별한 여행안내서
헤세의 여행(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편역, 연암서가)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여행은 언제나 체험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만 뭔가 가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1877~1962)는 1904년에 쓴 ‘여행에 대하여’에서 ”여행의 시학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현대 여행산업의 끔찍함과 무의미한 여행 열기 그 자체에 대해 한번 속 시원히 비난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는 첫머리로 글을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기차 안에서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가 어느 독일 가족으로부터 “입다물라”는 차갑고 정중한 부탁을 받았다고 같은 글에서 능청스레 털어놓았지만, 독일 낭만주의의 혈통이 섞인 노벨 문학상 작가이며 휴머니스트인 이 작가에게 여행이란, ‘어떤 나라와 민족, 어떤 도시나 풍경을 자신의 정신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며, ‘헌신저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선 것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낯선 것에 담긴 본질의 비밀을 끈기 있게 알아내려 노력하는 행위’다. 그래서 여행은 우연한 마주침과, 세상이 숨겨놓은 본질로의 헌신적인 지향이 두 바퀴를 이뤄 밀어가는 수레다.

그것은 누구나 가보는 명소나, 여행책자에 화려한 도판으로 설명된 유적지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헤르만 헤세에게 여행의 체험이란 성당이나 오래된 궁전이 아니라 정원 ‘자르디노 디 보볼리’에 있는 조그만 금붕어 연못이며, 박물관 속의 명화가 아니라 여관 여주인과 부엌에서 나눴던 잡담이며, 오페라 공연이 아니라 수다스러운 재단사의 즉석 가창이고, 여관딸에게 반한 시골총각과의 ‘주먹다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연과 낭만, 즉 예기치 않은 소동이나 이미지가 본질과 “시학”을 대체할 수는 없는 바, 여행자는 삶과 자연, 세계를 자신의 정신과 영혼 속에 유기적 통일성을 갖춘 내용과 의미로 소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낯선 땅과 삶, 사람, 역사에 대한 사랑과 헌신, 연습이 필요하다.

헤르만 헤세는 20대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 이후 평생에 걸쳐 세계를 다녔다. 최근 출간된 ‘헤세의 여행’은 24세부터 50세까지 헤세가 쓴 여행과 소풍에 관한 에세이와 여행 기록을 엮은 것이다. 스위스, 남독일, 이탈리아, 아시아 여행기가 담겨져 있다. 청춘에 대한 강렬한 향수와 때때로 빠져드는 자연의 황홀경에 대한 찬탄, 희로애락이 그려내는 삶의 다양한 표정과 무늬, 여행자가 현지의 자연 및 사람, 삶과 세상에 합일되는 정서적인 경지가 헤르만 헤세의 아름답고 유머러스하며 성찰적인 문장으로 담겨졌다.

그는 자기 손에서 시든 아네모네와 거리의 가난한 소녀들이 파는 싱싱한 아네모네를 통해 봄날의 빛나는 피렌체와 삶의 한 비경을 그려내고, 스위스ㆍ이탈리아 경계이자 알프스의 관문인 코모에 가서는 삶의 무상함을 드러내는 음침한 해골 피라미드와 그 앞에 놓인 화려하고 생동하는 아이들의 꽃장식을 마주하며 그 어느 것보다도 강렬하고 황홀한 느낌을 전한다. 헤르만 헤세가 아네모네로 빛나는 삶의 한 순간으로서의 묘사한 봄의 피렌체는 안데르센이 청동멧돼지상에 올라탄 거지 소년의 하룻밤 꿈 속 모험담으로 묘사한 겨울의 피렌체 여행담(‘안데르센의 지중해 기행’, 예담)과 대조를 이룬다.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로버트 고든 지음, 유지연 옮김, 펜타그램)
그렇다면 헤르만 헤세의 이탈리아 여행 시대로부터 100년이 넘은 지금, 진정한 여행이란 무엇일까? 미국 인류학자 로버트 고든 교수(버먼트 대학교)의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는 미국어와 독일어, 인류학자와 소설가 그 차이만큼이나 다른 언어와 표현을 쓰지만, 핵심은 같다. 사람들은 다른 나라나 지역을 잘 알게 된다는 교육적인 이유로, 자아 발견을 촉진한다는 이유로, 그게 고상한 일이기 때문에, 아니면 마약이나 섹스같은 특수한 재미이나 가족ㆍ현실로부터의 압박에서 도피하고자 여행한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이란 “단순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새로운 상징을 수집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계몽과 해방에 이르기 위한 순례”이며 자기 성찰이고 타자에 대한 이해다. 이것을 위해 제안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 또는 인류학의 연구방법론인 민족지학과 같은 여행이다.그것은 직접 낯선 사회와 집단, 그리고 구성원의 일상에 직접 참가하는 것이며, 관찰하고 기록하는 행위다. 전제는 모든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며, 현지인과 그들의 삶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는 언뜻 수많은 여행 안내서와 여행 에세이의 하나로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묻혀버릴 저서는 아니다. 여행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문화인류학적인 세심함과 사려깊음이 돋보인다. 소비문화이자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위이며 자기 성찰의 의례(儀禮)로서 여행을 다룰 뿐 아니라 성, 인종, 계급, 국가간 경제적ㆍ문화적 격차를 재생산하고 확인하는 권력불평등 현상으로서 사회적 차원의 여행 이야기도 담겨 있다. 책의 절반은 마치 인류학 교수가 신입생들에게 민족지학 연구방법론을 설명하듯 여행을 준비할 때 고려할 문제와 짐싸기, 현지인과 수다떨기, 건강과 안전문제, 그리고 여행에 관한 좋은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담았다. 

그리스의 끝 마니(패트릭 리 퍼머 지음, 강경이 옮김, 봄날의 책)
요 몇년간 해외 여행 안내서가 서점가에서 큰 유행을 타고 있고, 최근엔 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관련 도서도 쏟아지는 가운데, 그중에서 ‘헤세의 여행’과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는 단연 눈에 띄는 작품들이라 할 것이다. 

최근 출간된 패트릭 리 퍼머의 ‘그리스의 끝 마니’도 출중한 여행기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가장 풍부할 뿐더러 유머와 활력, 정보, 문학적 재기로 가득찼다. 그럼 마니는 어디인가. 저자는 북쪽인 스파르타로부터 그리스의 최남단 곶인 마니로 들어가는 여정을 택해 입성을 눈앞에 두고 한 식당에 가서 편지를 쓰는 데 그것을 본 식당 여주인이 한마디한다. “그럼, 지금 마니라는 곳에 와 있다고, 돌멩이만 있는 무지 더운 동네라고 쓰세요.”

19세기 지중해의 풍경(리처드 하딩 데이비스 지음, 최자영 외 옮김, 안티쿠스)
그러나 패트릭 리 퍼머라는 뛰어난 여행작가이자 스토리 텔러는 돌멩이만 있는 오래된 도시에서 온갖 신화와 현대사와 동시대인들의 삶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끌어올리고 황홀하거나 쓸쓸하거나 자연의 다양한 표정들을 잡아낸다. 패트릭 리 퍼머(1915-2011)는 제 2차 대전에 종군해 게릴라활동을 벌였던 영국의 전쟁영웅이자 여행 작가로 뛰어난 말솜씨와 유머 감각, 명석한 두뇌, 잘생긴 외모로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리스의 끝 마니’는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펼쳐내는 이야기가 유려해 지루할 틈 없는 작품이며, 여행기란 무릇 이래야 한다는 느낌까지 준다. 

이 밖에도 최근 출간된 여행기 중에선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1864~1916)의 ‘19세기 지중해의 풍경’도 볼만하다. 종군기자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희곡작가인 저자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모로코 탕헤르, 이집트 카이로, 그리스 아테네, 터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걸쳐 이르는 여정을 담아내고 있으며, 미국인 작가의 눈에 비친 당시 국제적 역학관계와 민중들의 삶이 잘 나타난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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