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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속으로 - 김석동> 지중해의 보석, 몰타의 역사이야기
강화도와 비슷한 작은 섬나라
유럽과 아프리카 잇는 자리탓
인접국가와 수많은 곡절 겪어
지금은 가장 살기좋은 도시로



지중해를 여행하면서 몰타에 들렸다. 아테네를 출발해 꼬박 하루 반을 달린 배가 마침내 육지에 접근했다. 갑자기 바다 가운데서 중세의 모습을 지닌 찬연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발레타 항구다. 몰타는 이탈리아 남서부 시칠리아섬에서 남쪽으로 약 93㎞ 떨어진 인구 40만명의 강화도와 비슷한 크기(316㎢)의 작은 섬나라다. 수도인 발레타는 서울에서 직선거리가 9310㎞에 달하는 멀고 먼 지중해 한가운데에 떠있다. 이 섬은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아주 먼 옛날부터 인접국가와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어 왔다.

몰타의 역사는 BC 3000년대 중반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석조 사원 등 대단히 발달한 신석기시대 거석문화유물이 이를 증명한다. BC 1400년대에는 이탈리아반도 등지로부터 청동기문화가 유입됐고 이후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등 지중해를 지배한 세력들이 차례로 이 섬을 차지했다.

로마가 몰타를 지배할 때 일이다. AD 60년경 사도 바울이 기독교 선교죄로 체포돼 재판을 받기위해 로마로 압송되는 중 크레타섬을 지나 몰타 인근에서 난파를 당했다. 그는 3개월간 몰타에 머무르면서 전도를 했고, 이때 로마인 파견관 푸블리우스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후에 몰타 최초의 주교가 됐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성바울 성당이 세워졌고, 지금도 예배를 본다. 신약 사도행전 28장 1절의 ‘멜리데’라는 섬이 바로 몰타다.

동서로마 분리 후 비잔틴제국이 점령한 이 섬은 870년경 이슬람세력의 지배에 들어갔다. 11세기 십자군 전쟁때 시리아지역으로 출정했던 성요한기사단(일명 몰타기사단)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다시 이슬람세력에 점령되고 십자군이 패배하자 방향을 바꿔 1309년 터키 남부의 로도스섬을 점령해 근거지로 삼고 사실상 독립국가를 세웠다. 이들은 해적활동을 하는 등 오스만투르크와 대치했는데, 이 오스만투르크가 바로 몽골고원에서 발원한 기마군단 돌궐(투르크)의 후예다. 돌궐제국 멸망 후 투르크인들은 위구르를 세웠고 다시 서진해 셀주크투르크를 건국했으나 몽골군에 멸망당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을 완성한 술탄 슈레이만 1세는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1522년 로도스섬을 점령해 버렸다. 이에 성요한기사단은 로도스섬에서 쫓겨나 1530년 몰타섬으로 옮겨갔고, 이로 인해 몰타기사단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 몰타섬을 지배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에스파냐왕은 기사단에게 매년 매(hawk) 두마리를 바치는 상징적인 대가로 사실상 섬을 무상 양도했다. ‘몰타의 매’라는 유명한 소설과 영화는 이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물이다. 몰타기사단은 이슬람선박을 계속 공격했고, 이에 오스만투르크 함대는 1565년 다시 몰타를 공격하나 기사단은 발레타장군의 지휘하에 맞서다 유럽지원군의 도움으로 전쟁을 끝냈다. 그 발레타장군의 공적을 기려 몰타의 수도인 그 항구를 발레타로 이름 지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길에 몰타를 점령하고 기사단을 내쫓았으나 나폴레옹 몰락 후 영국령이 됐다가 1964년 독립해 영연방국가가 됐다. 내쫓긴 몰타기사단은 세력이 급속히 약화돼 유럽을 전전하다가 1834년부터는 로마에 정착하면서 무력활동을 포기하고 인도적인 활동만 유지하는 종교조직으로 변신, 영토없는 비공식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몰타는 우리와 비슷한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역사의 흐름속에서 수많은 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지중해의 이 작은 섬이 멀리 몽골고원에서 유래하고 발원한 아시아 기마군단 오스만투르크가 유럽세력과 대치했던 최서단 지역이여서인지, 처음 찾았지만 감회가 유난히 새로웠다.

김석동 前금융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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