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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장 1930년대?…‘독자고민 상담란’에 비친 요지경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15세 때 다섯 살 어린 남자와 결혼했던 31세의 여자. 이제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해 애까지 낳았고 시가에서도 버림받았으니 개가를 할까 묻는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세의 여성은 모 전문학교 학생과 서로 사랑하게 돼 호적까지 동원해 미혼임을 확인하고 결혼을 약속했으나 알고 보니 숨겨둔 처자식이 있었던 경우다.

남자들도 못할 노릇인 건 마찬가지다. 열 세살에 부모가 시켜 결혼을 했다는 30세의 교사는 아내가 마음에 안 들어 멀리했으나 본능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딸도 낳고, 어쩌다 한방에서 자는 때에는 늘 관계도 했다. 그러나 아내하고는 영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새 처를 얻어 새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난감해한다. 혼외의 애정행각 주인공은 대개 남성의 몫이었으나 ‘아내의 반란’도 없지는 않았다. 28세의 유부녀인 한 직업여성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4살 연하 청년의 씩씩한 점에 마음이 끌려 일시적인 흥분을 참지 못하고 어느날 퇴근길에 그만 ‘불의의 관계’를 맺었다고 털어놓았다.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1930년대 일간지 독자고민상담란에 투고된 사례다. ‘사랑과 전쟁’이 따로 없고, ‘막장’도 이런 ‘막장드라마’가 없다. 성문제에 이르면 점입가경이다. “간통한 처를 어찌하리까”라고 묻는 26세의 청년, 어렸을 때 잠시 한 연애로 정조를 빼앗겼으니 예비남편에게 이를 고백해야 하느냐 묻는 결혼 앞둔 18세 여성,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채 결혼을 했는데 출산이 가까와 오니 마음이 더욱 괴롭다고 토로하는 양반가의 며느리까지, 사연도 각양각색이다. 부부간 성적 갈등, 미혼모 문제, 동성애 고민, 고부갈등, 남편 폭력 등도 심심치 않게 다뤄졌다.

통계나 정치사, 제도사로는 알 수 없는 개인의 내밀한 삶을 통해 1930년대의 시대 풍경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과 및 문화기술대학원 전봉관(44) 교수가 최근 펴낸 ‘경성고민상담소’(민음사) 속 사례들이다. 


“어떤 사람의 하루는 8시간의 공적 삶과 8시간의 사적 삶, 그리고 8시간의 잠으로 이루어집니다. 공적인 영역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인간의 삶과 시대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사적인 영역까지 들여다보아야 한 인간, 한 시대에 대한 총제적인 평가가 나오죠. 제가 1930년대에 착목한 이유는 전근대적인 윤리가 해체됐지만 아직 근대적인 윤리는 온전히 자리잡지 못한 문화적인 격변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역사는 민중과 노동자계층의 형성 및 발견,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의 양상 등을 다루겠지만, 그것으로 과연 그 시대의 개인들이 삶을 살았고, 어떤 것에서 희로애락을 느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 작업은 당대의 삶과 시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전 교수는 근대조선의 금광개발열풍과 살인사건, 투기열풍, 자살사건 등을 다룬 ‘황금광시대’와 ‘경성기담’, ‘럭키경성’, ‘경성자살클럽’ 등을 펴냈다. 최근작 ‘경성고민상담소’에선 1930년대 ‘조선일보’의 ‘어찌하오리까’란과 ‘조선중앙일보’의 ‘명암의 십자로’란에 실렸던 500여건의 문답사례를 분석했다. 성과 사랑과 결혼 등에 관한 고민들을 유형별로 나누었는데, 그러고 보니 시대상이 한 눈에 잡힌다. 부모의 강요로 인한 조혼이 나이 들어 부부간 갈등을 낳고, 남편과 달리 교육받지 못한 구여성의 ‘소박’을 가져온다. 학교 다니느라 비교적 결혼이 늦은 신여성은 남자와 자유연애를 즐기는데 대개 그 정도의 나이와 위치에 이른 상대는 기혼남이다. 구여성은 소박맞고, 신여성은 ‘제 2부인’(첩이나 정부)이 되니 여성들의 수난사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 완고한 어머니까지 세 여성 틈에 낀 남자들도 속이 썩어들어가긴 마찬가지였다.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전 교수는 “통계나 거시사에 묻혔던 성과 사랑, 가족에 대한 말못할 고민을 통해 당대 삶의 ‘개별성’을 복원하는 작업”이며 “과거 세대가 현재 세대보다 더 윤리적이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의 실상, 즉 동방예의지국의 신화나 젊은 시절에 대한 기성세대의 망각을 따져보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현재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에서 근대문학과 근대문화 및 글쓰기 등 교양을,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대중서사장르를 비롯해 기업, 브랜드, 미디어, 상품 등과 결합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전 교수가 ‘스토리공학’이라고 이르는 스토리텔링의 방법론은 통계나 제도가 아닌 ‘이야기’로 시대를 보여주는 ‘경성고민상담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 셈이다. 그는 스토리공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스토리텔러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있는 체계를 만들어가는 한편, 개인적으로는 근대 문화에 대한 연구 및 저술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조선의 개항(1876년)에서 20세기 초까지 시대를 앞서갔던 인물을 조명하는 저술과 글쓰기에 관한 책, 일제 강점기 백만장자 2세의 부친 살해사건을 그린 논픽션을 준비 중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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