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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광장 - 정용덕>120년전의 갑오경장과 오늘의 국가개조
내달초 갑오경장 두번째 회갑
근대화 시발됐지만 실패로 끝나
탈인사성 등 전근대성 탈피
全국가적 협력속 개혁 이뤄지길



우리나라에서 근대화가 추진되기 시작한 시점에 관해 다양한 유형의 학설들이 있다.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 침략, 내부적으로는 봉건주의 통치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민중 의식이 싹튼 1860년대를 근대화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그 중 하나다.

쇄국주의(鎖國主義) 정책을 끝내고 미ㆍ영ㆍ독ㆍ불 등 여러 나라들과 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는 계기가 된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 체결과 ‘개항(開港)’을 분기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가 하면, 1894년 7월초부터 1년 7개월에 걸쳐 ‘홍범 14조’의 이름으로 각종의 서구식 제도들을 도입한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근대화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도 유력한 학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설들은 한국에서 근대화의 시작을 이끈 계기나 사건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 초점을 두어 특히 그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처럼 서로 다른 차원의 다양한 요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위에서 든 세 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학설들은 모두 근대화 과정에서 외세가 직ㆍ간접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한다. 그러한 불가항력에 대응하면서 나름대로 자구책을 모색했던 내국인들의 노력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다만, 그 내국인 가운데 누가 주체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차이를 보인다. 첫 번째 학설은 반외세, 반봉건의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근대 지향의 의식을 싹 틔운 일반 대중에 초점을 두어 ‘아래로부터의 근대화’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두 번째와 세 번째 학설은 당시 권력엘리트들의 국내ㆍ외 상황에 대한 판단과 개혁지향적인 행동에 초점을 두어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들이 있다. 위에서 든 세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한국 근대화에 중요한 계기는 되었으되, 그것이 성공한 혁명이나 개혁이 아니라 하나같이 실패의 되풀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각각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게 된 주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 개혁이 일부 사람들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일반 대중의 뜨거운 개혁 열망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외세의 등에 업힌 권력 엘리트들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그로인해 결국 실패로 끝난 갑오개혁이 전형적인 예다.

내달 7월 초면 갑오경장의 두 번째 회갑을 맞는다. 마침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국가개조’ 혹은 ‘국가개혁’의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뒤늦게나마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서두르던 12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늘의 한국인들은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역시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여건 속에서 살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열악한 국민경제와 민도(民度)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도 근대화를 추구했던 한국인들이지만, 아직도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대목이 적지 않다.

예로써, 이번 세월호 참사를 초래한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를 근대적 행정의 요체인 ‘탈사인성(impersonality)‘이 충분히 배태되지 않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아는 사람 봐주기가 대형 재난의 원인”이라는 위험사회 이론의 전문가 이재열 교수가 지적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가 국가개조를 추진하면서 120년 전 갑오개혁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학습해야할 사항 가운데 하나는 아무리 좋은 명분의 개혁이라고 해도 그것을 정치행정 엘리트들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민사회, 시장, 그리고 국가 부문 모두에서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상호 간에 충분한 소통과 이해 그리고 합의를 바탕으로 협력이 이루어지는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유다.

정용덕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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