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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추모 · 연대…하나의 물줄기가 큰 파도로
2002년 효순·미선 추모서 세월호까지…각계각층 목소리 모여 ‘공론의 장’으로
전문가 “촛불은 사회 건강하다는 증거”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이 있고 밀실이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은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최인훈의 ‘광장’ 중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자신이 설 곳을 찾지 못한 소설 속 이명준의 독백이다. 소설은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로 대변되는 ‘밀실’과 ‘광장’의 갈림길에 섰던 이명준을 통해 1960년대 남북 분단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학자 대니엘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주창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라는 오래된 표현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제 소설 속 광장은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한 축이 아니라 시민들의 연대와 공감의 장으로 모습을 바꿨다. 현대인들은 밀실과 광장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광장은 밀실의 연장선상에 있고, 밀실은 광장의 축소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광장은 촛불로 불을 밝혀 왔다.


촛불집회의 기원은 199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통신망인 하이텔의 유료화에 반대해 처음 열린 촛불집회는 2002년 6월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경기도 양주의 지방도로에서 길을 가던 신효순, 심미선이 주한미군의 장갑차량에 깔려 그 자리에서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두 여중생을 추모하자는 뜻으로 인터넷을 통해 촛불시위가 제안됐고,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확산돼 그해 11월 경복궁 광화문 앞은 촛불행렬로 가득찼다. 단순한 추모집회에서 시작한 촛불집회는 사고 장갑차 운전병들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반미 시위의 성격을 띠며 시민들을 광장으로 모이게 했다.

과거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이 공권력과 정면 충돌하면서 폭력적 시위로 전개됐다면, 촛불집회는 시위 문화를 한단계 성숙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의 대표적 집회ㆍ시위 문화로 자리잡았다.

촛불은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이 일어나자 재점화됐다. 탄핵에 반대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결국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 2008년 5월에는 10대 여학생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를 처음 열면서 시민들이 수입조건 재협상을 외치며 촛불을 들었다. 당시 촛불집회는 주도세력이 없는 자발적 모임으로 이뤄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 연인과 같이 나온 대학생, 정장 차림으로 퇴근길에 들른 회사원,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들까지 사회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했다. 바야흐로 광장이 시민 개개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론의 장이 된 셈이다. 이제 시민들은 ‘밀실’을 찾지 않는다.

이번 세월호 사고를 추모하는 촛불도 지난 17일 종로 일대를 밝혔다. 188만명이 안산 임시정부합동분향소와 서울 광장에 마련된 분향소 등 전국 합동분향소를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한편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5주기를 맞아 김대중노무현대통령기념공원위원회는 세월호 사고로 인해 대규모 광장 추모 행사를 전면 취소하고 추도식만 간략히 진행했다.

바람이 불면 힘없이 꺼지는 게 촛불이지만, 다시 심지에 불을 붙이면 제 몸을 태우며 주위를 밝히는 것도 촛불이다.

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광장에서의 의견 표출은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간접 민주주의의 대의성이 약해지며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특정 세력에 의해 정파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촛불집회 자체는 한국 사회의 건강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태형 기자/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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