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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전태일·박종철 '역사 바꾼 열사'

내년에 해방 70년을 맞이하는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한국 사회에 격변을 가져 온 인물을 꼽는다면, 경제 성장기 근로자의 권익을 찾은 전태일과 6월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이한열을 들 수 있다.

전태일은 박정희 정권 시절 청계천 피복노조에서 노동운동을 벌이다 “노동자도 인간”이라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노동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산화했다.

22세 되던 1970년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면서 시민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80년대 대학생들의 노학투쟁에 불씨를 지폈고, 당시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도 이념 고민보다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전태일의 죽음은 음지에 머물렀던 노동권을 광장으로 끌어내 빛을 보게 했다.

노동계를 중심으로 사회 변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중 1987년 4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을 포함한 ‘4ㆍ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종교계 및 재야 단체에서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이 잇따라 발표되는 등 비난여론이 빗발쳤다.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통해 서울대 재학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ㆍ축소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ㆍ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 규탄대회를 민주헌법 쟁취투쟁과 결합시켰다.

한편 6월 9일 교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재학생인 이한열이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국 각 도시로 최루탄발사 규탄시위가 확산됐고, 전국 14개 도시에서 20여 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서울에서는 전경이 무장해제당하고 경찰서는 돌과 화염병 세례를 받았다.

20일간 지속된 6월 항쟁으로 집권세력은 ‘6ㆍ29 선언’을 발표,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했다. 사무직 노동자 등 중산층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폭발된 국민의 민주화 열기가 제5공화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이태형 기자/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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