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자연, 정체성, 이원성이라는 테마를 탐색하며 철학적인 작업을 전개해온 미국의 현대미술가 로니 혼이 세번째 서울전을 연다.
걸출한 여성작가 루이스 부르즈아(1911-2010)를 잇는 재목으로 손꼽히는 로니 혼이 5월 20일부터 서울 삼청로의 국제갤러리 K2, K3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지난 2007, 2010년에 이어 또다시 열리는 작가의 서울 전시는 크게 두 파트로 짜여졌다. 두개의 전시공간에 로니 혼은 각기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사진 및 조각 연작을 설치했다.
로니 혼의 간결하면서도 명징한 신작들은 시간, 기억 그리고 지각을 성찰한 것들이다. 대단히 차분하면서도 명징한 그의 작업들은 관객의 시선을 힘있게 잡아당긴다.
K3관에 설치된 유리 주조 조각은 마치 얼음덩이처럼 보인다. 사각의 미니멀한 조각들은 얼음이 막 녹아내릴 것같은 느낌을 준다. 이전의 유리 조각보다 큰 크기로 제작된 신작들은 전시장 전체를 꽉 채울 듯 육중함을 선사한다. 찰랑거리는 조각의 표면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거대한 물의 덩어리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 매혹적인 연두색, 빙하를 연상시키는 푸른색 등은 대지와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로니 혼의 트레이드 마크로 꼽히는 이 유리 조각은 작가가 대학 졸업 후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행한 아이슬랜드의 대기와 빙하에서 받은 영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생명과 죽음, 물과 얼음, 냉기와 온기가 공존하는 아이슬랜드에서의 경험은 작가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보다 깊이있고 철학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문학, 특히 시(詩)를 사랑하는 작가는 K3관에 전시된 작품에 독특한 제목을 붙였다. 정식 작품명은 ‘무제’이지만, 이를테면 “개들을 겁먹게 하는 햇빛의 변화들”, “하나의 색감으로 변질된 무지개“, “유성우 속에서 잠들었던 것에 대한 슬픔의 감각”, “여자들만 거처했던 주거지 안의 달리 설명할 길 없는 불”,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는 빛” 같은 예리한 시귀들을 부제로 달았다. 물론 작가는 감상자들이 부제에 맞춰 작품을 해석하길 강요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작품의 지향점을 흥미롭게 가리키고 있다.
K2관에는 혼의 사진 연작 “You are the Weather, Part 2”(2011년)가 내걸렸다. 이 사진 연작은 로니 혼의 유명한 전(前)작인 “You are the Weather (1994-1996)”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아이슬랜드의 온천과 수영장에 몸을 담근채, 카메라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여성을 연속적(100컷)으로 촬영한 “You are the Weather, Part 2”는 짧은 시간 동안 여성의 얼굴표정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와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다.
작은 사진들을 긴 띠처럼 연결한 작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그 고요한 떨림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작가는 이 작업에 대해 “당신은 당신을 주시하는 한 여성에 의해 잠시동안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고 밝혔다.
로니 혼은 지난 1970년대 중반부터 조각, 사진, 드로잉 작업을 통해 기존 사회의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정의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즉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변화하기 쉽고, 불가사해한 인간 주체를 주목해왔다. 그는 또 물, 빛, 날씨 같은 자연환경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지각과 시각적 경험 또한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은, 시각적 지각과 기억의 잔상효과 사이의 이원성을 드러낸 작품으로 귀결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