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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칼럼 - 박영서> 중국과 베트남, 그 애증의 역사
기원전 111년 한무제(漢武帝)가 남월(南越)을 정복함으로써 베트남 북부 지역은 중국의 지배를 받게된다. 한무제의 남월 공격은 남쪽 변방을 안정시키고 물소 뿔, 상아 같은 남방의 산물을 얻기 위해서였다. 베트남과 중국의 악연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나라 때는 안남도호부에 속해 있었기에 ‘안남’이라고 불렸던 베트남은 당나라 멸망 후 5대 10국의 분열기를 맞고나서야 비로서 독립을 쟁취했다.

서기 939년 응오꾸엔(吳權)이 응오(吳)왕조 수립에 성공하면서 베트남은 중국의 1000년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조공관계로 바뀌게 된다. 1407년 명나라 영락제에 의해 20년동안 잠시 지배를 받은 적은 있지만 베트남은 원(元)· 명(明)·청(淸) 등 중국 왕조들의 거듭되는 복속 시도를 격퇴하면서 독립을 유지해 나갔다.

중국과의 악연은 베트남이 프랑스 지배에 들어간 시기부터는 선연으로 전환된다. 프랑스와 미국과 치른 전쟁에서 중국은 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후원국이었다. ‘골리앗’ 프랑스 군을 몰아낸 디엔비엔푸 전투의 빛나는 승리는 중국이 제공한 105밀리 곡사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을 패배시킨 베트남 전쟁에서도 중국의 후방지원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양국은 베트남전이 끝나자마자 적대 관계가 되어버린다. 덩샤오핑은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을 벼르고 있었다. 1979년 2월 17일 자정 인민해방군 20만 병력은 베트남 북부 국경선을 넘어 기습공격을 단행했다. ‘중월(中越)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주력 정규군이 캄보디아에 가있던 베트남은 지역 민병대를 동원해 총력 방어전에 나섰다. 산악지형과 복잡한 지하터널을 이용한 전술,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단련된 민병대의 노련함, 미군이 남긴 최신 무기는 실전경험이 부족하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낡은 장비를 써야했던 중국군에게 뼈아픈 고통을 안겨줬다.

중국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면서 한달 후인 3월 16일 철군을 완료했다. 3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중국 입장에선 전쟁의 결과는 응징이 아닌 치욕이었다. 3일 후 베트남 국방부는 “전쟁이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고 발표했다. 중월전쟁으로 양국 관계는 단절됐다가 1991년 복교됐다. 복교 이후 두 나라 관계는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던 양국 관계는 최근 중국의 남중국해 원유시추를 놓고 다시 격렬한 파열음을 내기시작했다.

지난 1일 중국 해양석유총공사가 남중국해 파라셀(중국명 시사·베트남명 호앙사)군도에 석유시추장비를 설치한 것을 계기로 양국간 관계는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바다위에선 물대포에 전투기까지 동원돼 공방을 벌이고 있다. 베트남 전역에선 중국을 비난하는 시위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국지적 충돌까지 엿보이는 중월전쟁 이후 가장 심각한 갈등국면이다.

수천년동안 베트남과 중국은 악연과 선연의 역사를 이어왔다. 지금도 애증의 역사는 진행형이다. ‘가깝고도 먼’ 두 나라가 역사의 한 장을 접고 새로운 다음 장을 열어나가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한 걸음씩 물러나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신뢰관계의 형성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이다. 

박영서 베이징 특파원 /py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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