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저는 우리가 딛고 있는 발밑이 궁금해요. 지층 밑이 어떤 모습일까 종종 생각하곤 하죠. 그래서 지층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보며 지층변화를 연구했어요. 정말 흥미롭더라고요. 물론 지질학자가 아니라 대단한 건 아니지만 땅 아래 수백만년, 수천만년 역사가 있을텐데 그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지층도 끝없이 움직이고, 숨쉬고 있으니까요”

멕시코 출신의 작가 다미안 오르테가(47)는 좀 특별한 아티스트다. 어떤 형태(피규어)를 구현하는 작업 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데 더 집중한다. 돌, 콘크리트, 벽돌, 철근, 골판지 등 버려지거나 이제는 쓰임새를 다한 주변 재료들에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곤 이를 집적하거나 재해석해 독특한 작품을 제작한다.

비(非)미술적 재료로 작업하는 오르테가,“우리 발밑,지층이 궁금해요”

서울 삼청로 54번지(소격동)의 국제갤러리(회장 이현숙)가 비(非)미술적 재료를 다루는 작가 다미안 오르테가의 국내 첫 개인전을 마련했다. ‘다미안 오르테가, Reading Landscapes’라 명명된 이번 전시에는 다양한 신작 설치작품과 입체작품이 출품됐다.

조각 작업으로 잘 알려진 그는 일상 사물에 숨겨진 특성과 잠재성을 드러내길 즐긴다. 그것들이 품고 있는 사회적 함의와 유머를 공학적 테크놀로지로 혼합해 관람객들에게 색다른 질문을 던진다. 즉 물질성과 형상, 기능과 쓸모 없음을 주제로 우리의 환경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또다른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

비(非)미술적 재료로 작업하는 오르테가,“우리 발밑,지층이 궁금해요”

국제갤러리 K3관 중앙에 설치된 지구 형상의 작품 ‘Viaje al centro de la tierra: penetrable’은 이번 전시의 핵이다. 전시의 전체 개념을 집약해 보여주는 작업으로, 오늘날 지구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축’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1㎜∼5㎝ 크기의 수많은 돌멩이를 투명한 실에 매달아 둥근 구(球)로 만들어, 지구의 핵과 지층을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오르테가의 이 ‘매달린 조각’은 엔지니어용 설계도의 조각적 버전처럼 보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땅 밑을 성찰하게 만든다.

극장의 배우였던 부친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모친 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랐던 오르테가는 한동안 멕시코 신문에 정치만화 등을 연재했던 카투니스트 출신이다. 만화와 미술작업은 매우 다를 수 있으나 나름의 시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고 한 그는 “신문사에서 일하며 느낀 점이 많다. 오늘 매우 중요한 사건들 또한 몇시간, 며칠만 지나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다. 오늘의 핫한 뉴스가 담겨 너도나도 보고 싶어하는 신문도 잠시 후면 종이쪼가리가 되는 걸 목도했다. 바로 그런 생성과 소멸의 과정은 지금 내 작업의 뿌리가 됐다"고 했다.

뉴비틀 해체해 스타덤 오른 오르테가 “우리 발밑,지층이 궁금해요”

이후 오르테가는 남미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인 가브리엘 오로츠코(Gabriel Orozco)와 프란시스 앨리스(Francis Alys)의 영향을 받았다. 한 때 오로츠코의 작업실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어 비영리 전시공간 ‘아르테 44’를 통해 본격적인 작업활동을 시작했다. 지금 그는 동시대 멕시코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주요작가로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 중이다.

오르테가는 데뷔초 폴크스바겐의 소형차 ‘뉴 비틀’을 분해해 차량 부품을 천장에 도면처럼 매달아 큰 화제를 모았다. ‘Cosmic Thing’이라는 제목의 이 작업은 일상의 사물을 해체해 마치 분해도처럼 그 요소들을 재구축한 것으로,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일상용품의 본질과 인간의 관계를 색다르게 해부한 작업을 통해 오르테가는 서구 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비(非)미술적 재료로 작업하는 오르테가 “우리 발밑,지층이 궁금해요”

작가는 ”멕시코에서는 뉴 비틀이 자동차의 아이콘으로 꼽힐정도로 아주 중요한 차(車)다. 나도 낡은 뉴 비틀이 있었는데, 처음엔 그것에 페인팅을 해봤다. 그런데 그림이 영 맘에 들지 않아 페인트를 지우기 위해 산을 부어버렸다. 그리곤 그 페인트 덩어리를 긁어버렸는데, 내 작업실 여기저기에 아직도 그 덩어리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카투니스트로 정규교육을 못받았던 나는 나름대로 책도 보고, 레슨도 받으며 다이아그램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다가 ‘뉴 비틀을 해체해 분해도를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해체해 그 부품들을 공중에 매달게 됐다"고 했다. 이 작업이 바로 ‘Cosmic Thing’으로, 이후 오르테가 작업의 근간이 되기에 이른다.

작가는 이번 서울전시에 크고 작은 돌들을 탑처럼 수직으로 쌓아올린 작품과 낡은 벽돌과 철근을 지층처럼 쌓아올린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또 자신이 받았던 각종 편지봉투며 영수증, 골판지를 뭉쳐 이를 덩어리로 응축시킨 오브제도 출품했다. 마치 커다란 달걀처럼 뭉쳐진 오브제는 절반을 갈라 전시되고 있다. 종이봉투와 골판지, 영수증이 켜켜이 집적된 ‘Geoda’라는 작품은 인간이 일상에서 주고받았던 기록이 마치 땅의 화석처럼, 지층처럼 변모해 시간의 깊은 궤적을 흥미롭게 드러내고 있다. 전시는 5월 11일까지.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