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다만 어제 꾼 악몽이고, 어제 본 영화였다면…. 그러나 비극은 끝내 현실이 됐다. 실제로 일어난 재난 사고는 영화의 소재가 됐고, 이들 작품들은 또 다시 닥쳐올 수 있는 재앙을 경고했다.
영화‘ 포세이돈’과‘ 타워’의 한장면 |
‘타이타닉’과 ‘포세이돈’, ‘타워링’. ‘타워’ 등과 같은 국내외화는 거대 여객선이나 대규모 빌딩이 지진이나 해일, 화재를 견디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유는 명확하다. 선박이나 빌딩의 소유주들이 돈을 벌기에 급급해 제대로 건축, 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계상의 결함이나 부실 시공, 무리한 항해나 준공이 재앙의 씨가 됐다. 사람들은 물과 불로 희생당하지만, 그것을 불러온 것은 인간과 기업의 탐욕이었다. 그러나 ‘예고없는’ 재앙은 없다. 사고는 늘 터지기 직전 아주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경고 신호’를 보낸다. ‘해운대’나 ‘포세이돈’ 처럼 지진파나 해일의 조짐이기도 하고, ‘타워’에서의 건물의 아주 작은 균열이나 누전사고 같은 형태다. 영화들은 이 ‘신호’가 보내는 경고와 위험을 더 일찍 감지하고 대처했더라면 대규모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뒤늦게 위험과 이상 조짐을 발견하더라도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으면 재앙을 키운다. 흔히 재난 영화 속 지도자나 관료, 스태프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미명하에 정보를 독점하고, 심지어는 왜곡해서 대중들을 호도한다. 재난을 초래한 개인과 회사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서 배가 침몰하고 빌딩이 무너지기 직전까지도 “안전하다”고 강변하곤 한다. 조금만 더 정보를 일찍 공개하고, 외부에 구조 요청을 보내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지도자가 빠르게 결단했다면 최소화될 수 있었던 사고가 끔찍한 비극으로 끝난다.
영화는 지도자의 헌신과 신속 정확한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포세이돈’에서는 배가 기울고 물이 차오는데도 선장이 “구조를 기다려라”고 말해 승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반면, 여객기 사고를 소재로 한 ‘플라이트’는 추락 위기에 처한 기장의 영웅적인 결단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 수많은 경험과 훈련을 통해 익힌 조종기술을 통해 희생을 최소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재앙에 닥친 사람들보다는 선박이나 건물 주를 이해를 쫓아 자기의 살길이나 도모하는 ‘영혼없는 관료’를 대신하는 것은 이름없는 자들의 영웅적인 희생이며 ‘헌신과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구조대원들이다. 재앙의 위험은 정보로부터 소외되고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자들에게 더 먼저, 더 크게 닥쳐오기 마련인데, 역설적으로 고난에 맞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도 키를 쥔 강자들이 아니라 약자들인 경우가 많다.
재난영화는 흔히 당대사회와 가치관의 반영물로 꼽힌다. 현실의 사고 또한 그렇다. 국민들을 위한 봉사와 헌신이 아닌 반칙도 불사하며 돈과 권력을 쫓는 지도자와 관료, 경제인들이 ‘성공모델’이 된 사회, 경제와 사회의 위기가 닥치면 가진 자들은 더욱 배를 불리고,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가장 먼저 고꾸라지는 사회의 비극이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불행의 이면이 아닐까.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