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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영주 봉황산 부석사①--비 한 방울 없이 1300년 살아온 선비화


[헤럴드경제=남민 기자] 키 작은 나무 하나가 ‘철창’에 갇혔다. 사찰이 가두었다. 잔혹하게도 철창 속에서 물 한 방울 얻어 마시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 그 곳에는 비 한 방울, 이슬 한 방울도 닿지 않으며 물을 주는 사람도 없어 인간의 손길과 자연의 은혜를 입어 본 적이 없다. 오로지 그냥, 스스로 척박함을 이기고 살아남아야 했고 또 살아남았다. 딱딱한 처마에서 1300여 년을.

영주 봉황산 부석사 선비화(禪扉花) 이야기다. 의상대사(義湘大師ㆍ625~702)가 지팡이를 꽂아 자랐다는 나무다.

조선 광해군(光海君ㆍ1575~1641) 시절 영남 관찰사 정조(鄭造)가 의상대사의 지팡이에 탐을 냈다. 덕을 쌓은 수행자가 가졌던 ‘대사의 지팡이’를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이 나무 줄기를 잘라갔다. 순간의 욕망을 채운 그는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부석사 조사당 처마의 철창에 갇힌 선비화.

또 이 잎을 닳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득남을 간절히 원했던 아낙들이 줄지어 잎을 훑어가면서 이 작은 나무의 수난은 끝이 없었다. 관절염에도 좋다 하여 ‘노린’ 사람들 또한 많았다.

선비화가 ‘옥’에 갇힌 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보호받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딱딱하게 굳은 처마의 지붕아래서 자라니 비와 이슬 한 모금도 구경 못했는데 이 나무는 잘 살고 있다. 누가 물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낮엔 해가 벗이 되어 줬고 밤엔 달빛이 동무되어줬을 뿐이다.

1300여년을 사람들에게 시달려 왔지만 신기하게도 부처님이 오시는 날엔 개나리 처럼 노란 꽃을 활짝 피운다. 놀랍다.

꽃 피운 선비화. 석가탄신일에 맞춰 노란 꽃을 피운다는게 신비롭다.[사진=영주시청]

전해오는 말이 1300여년 지났다는건데 그럼에도 나무는 고목이 아니다. 그저 손가락 굵기다. 키도 170cm 정도다. 누가 이 나무를 1300년 살아온 나무라고 믿을까.

7세기, 의상대사는 열반 직전 자신이 거처하던 부석사 조사당 처마에 중국서 가져온 지팡이를 꽂으며 “이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살아나면 국운이 흥할 것이다. 나무가 살면 내가 죽지않고 살아있느니라” 라고 했다. 그 나무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정말 그 긴 세월을 여기서 살아왔을까.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증언한 사람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다.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 문에 기대니 /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비하게 뿌리 내린 것이라 하네 / 지팡이 끝머리에 저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 비와 이슬의 은혜를 조금도 입지 않았네”

“擢玉森森依寺門 (탁옥삼삼의사문) / 僧言卓錫化靈根 (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曺溪水 (장두자유조계수) / 不借乾坤雨露恩 (불차건곤우로은)”

부석사를 찾은 퇴계 선생도 이 작은 꽃나무를 두고 감탄한 나머지 찬양한 시 ‘선비화(禪扉花)’다. 그의 시가 이 나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이곳 풍기군수로 부임한 때가 1548~1549년이니 이때 부석사에 들러 시를 지었다면 460여년 전에 이미 지금의 우리와 똑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았고 그 기록을 시로 남겼다.

그 때도 지금 처럼 비와 이슬 한 방울 없이 스스로 물이 생겨 살고 있다고 밝혀 놓았다.

의상대사가 거처했던 조사당. 국보 제 19호다.

그런데 정말 물 한 방울 없이 나무가 살 수 있을까. 또 천년 넘은 나무가 이렇게 작을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한 대학교수의 분석에 귀 기울여보면 의문점이 좀 풀리려나.

이 선비화는 줄기가 계속 굵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자라면 죽고 새 줄기가 다시 나와 세대교체를 하며 생명을 이어간다고 한다. 여러 해 살이 풀과 같은 나무다. 그래서일까, 학명도 골담초(骨擔草)다. 나무인데 ‘풀 초(草)’자가 들어간다.

그럼 물 한 방울 없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이 나무는 비와 이슬을 맞지 않는 곳에 있다. 원래 건조한 땅에 강한 나무라고 하지만 물 한 방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뿌리를 길게 뻗게 했고 마침내 먼 곳에 있는 수분을 빨아들일 수 있게 했다. 악조건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긴 뿌리를 뻗은 것은 마치 기린의 목이 긴 것과 같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법이 있는 모양이다.

이 의문점을 풀어주긴 했지만 신비로움까지 다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니 선비화는 부석사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무량수전에서 삼층석탑이 있는 오솔길로 5분쯤 걸어 올라가면 의상대사가 거처했던 조사당 처마에 있다.

태백산 끝자락과 소백산 시작점 사이의 남쪽 기슭 800m 고지에 자리잡은 영주 봉황산 부석사, 태백산 부석사라고도 한다. 사찰이름에는 흔히 그 산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데 봉황산은 태백산 끝자락 작은 봉우리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의 위용. 한 여행객이 석탑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한 지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은 시점, 삼국의 접경지였던 영주 주변 고구려ㆍ백제 주민들은 통일신라 국민으로 쉽게 단합하지 못했다. 이에 문무왕은 패망한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을 위로하고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의상대사에게 호국사찰 창건을 요청했다.

때마침 의상대사는 당나라 수도 장안 남쪽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대사(智嚴大師)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나라가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한다는 첩보를 얻었고 671년 급히 귀국해 국왕에게 보고한 터였다. 국내외 상황이 긴박했던 시절, 호국사찰로 국민을 통합해야 했다.

그러나 절 건립은 순조롭지 못했다. 500명의 이교도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절을 짓지 못하게 막았다.

이때 의상대사를 사랑했던 한 여인이 나타나 도움을 준다. 

회전문을 통해 본 부석사 경내.

(영주 봉황산 부석사②에서 계속)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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