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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 함영훈> ‘수치심 보듬기(Listening to shame)’ 에 대하여
1994년 처음 방영된 ‘사랑의 스튜디오’는 요즘의 ‘짝’처럼 일반인 커플맺기 프로그램이었다. 다만 출연진 합숙은 없었고, 자기소개와 문답, 스튜디오 가설 노래방에서의 개인기 등만 보고 맘에 드는 상대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카메라는 두세대면 족했다. 잘된 메이크업에 매무새 있는 의상을 입고 당일치기 녹화로 가장 괜찮은 화면들만 편집했다. 2002년엔 남자 연예인과 일반인 여성을 맺어주는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이 신설됐다. 3박 4일 합숙촬영이지만 야간녹화는 거의 없었다. 게임하고 춤추는 화면이 대부분이었고, 감성어린 고백들을 주고받지만 출연자들의 미세한 심리 변화가 적나라하게 전파를 타지는 않았다.

2011년 시작된 ‘짝’은 달랐다. 촬영지 도착부터 최종선택까지 수십대의 고정 및 이동카메라가 곳곳에 배치돼 출연한 일반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찍는 것은 물론이고 미리 녹화한 가정과 사생활까지 공개된다. 민낯, 감정 기복, ‘어장 관리’, 유혹, 배척, 변심, 소외, 눈물, 막말, 학력, 직장 정보 등이 고스란히 안방에 전해진다. 침실, 거실, 주방, 마당, 차 안 등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돼 주인공의 온갖 행동을 전 세계 사람들이 구경하는 영화 ‘트루먼 쇼’와 비슷하다. 연예인조차 치부가 노출되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일반인들로서는 당혹스런 일이 적잖을 만하다. ‘짝’에서 당하는 민망함이 전파를 타면 한국을 넘어 아시아적 망신이다.

‘스스로 출연신청해 제 발로 왔다’는 항변은 제작진이 출연자들의 감정과 사생활 관련 콘텐츠를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현행 명예에 관한 법률은 연예인까지 공인으로 의율해 노출해도 될 범위를 넓게 잡지만 일반인들의 경우 사소한 불명예 요소, 프라이버시라도 타인들에게 전해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자살사건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관리 운영의 문제를 떠나 근본적인 제작 마인드의 안일함에 ‘깊은’ 원인(遠因)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바로, ‘불명예로 공표되어질 출연자의 수치심 크기와 심각성’에 관심을 덜 기울인 것이다. 미국의 사회복지심리학자 브린 브라운은 일찍이 이렇게 진단했다.

“수치심은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지옥처럼 캄캄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거부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아웃사이더가 된 느낌이다. 수치심은 자기혐오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결점을 들켰을 때 느끼는 것이다. 그런 결점을 들키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

브라운 교수는 수치심이 발전의 원동력으로 선용되기 위해서는 관계인들의 ‘수치심에 귀 기울이기(Listening to shame)’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심리학적으로 치부(恥部)를 방어하는 20가지의 기제가 있지만, 숨진 전모 씨는 어느 것 하나 써보지 못하고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불행한 최후를 선택했다.

‘짝’ 존폐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방송사는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제작하든, 시민의 인권, 명예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대중적 노출에 익숙지 않은 사인(私人)들이 방송 탈 때의 감성은 만지면 깨질 우려가 큰 유리알이다.

함영훈 라이프스타일부장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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