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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X파일] "정작 우리는 우리것 외면하지만 지구 저편에선.." 민화작가 서공임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이 작가는 서울 북촌의 효자동 한옥에서 하루 12~16시간씩 작업합니다. 되도록이면 사람을 들이지 않은채 혼자서 조용히 화폭과 씨름하는 거죠. 

작업실 근처에 있는 인왕산 둘레길을 1시간 남짓 걷는 게 유일한 외출입니다. 오후 무렵의 산책도 건강이 워낙 나빠진 뒤, 의사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겁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때론 자정 무렵까지 웅크린채 작업하는 이 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민화가 서공임(54)입니다. ‘민화’하면 첫손에 꼽히는 작가이지만 그는 조수도 마다한채 혼자서 이렇게 오도커니 그림을 그립니다. 

너무 웅크린채 작업한 나머지 그는 목(경추) 디스크에 걸렸고, 어깨며 등짝이 거의 돌덩이처럼 굳어버렸습니다. 한동안은 붓도 못 잡을정도로 통증이 심해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죠. 그러나 어느정도 몸이 회복되자 그는 다시 붓을 부여잡고 작업에 몰두 중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키워왔던 화가의 꿈을 실현한 오늘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서공임 ‘득남을 축하드립니다’(50×70㎝,부분) 종이에 수간분채, 2010 [사진제공=롯데갤러리]

전북 김제의 외진 마을의 과수원집 딸로 태어난 서공임은 어린 시절 늘 배고픈 날을 보냈습니다. 형제가 워낙 많은 집안이었기 때문이죠. 

“방과 후 청소를 더 하거나하면 선생님이 커다란 옥수수빵을 주시곤 했어요. 그걸 먹으며 1시간 넘게 걸리는 집까지 걸어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훗날 그 옥수수빵을 유니세프에서 한국 어린이들에게 준 거라는 이야길 들었지요. 언젠가 나도 유니세프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하고 다짐했는데 민화작가가 되고나서 유니세프에서 ‘카드를 만들자’고 연락이 왔답니다. 무척 반가왔지요. 기쁜 맘으로 흔쾌히 응했어요. 30여년이 지나 고마움을 되갚았으니 우리 인생, 참으로 오묘하지 않나요? ”

초등학교 시절 그는 시간만 나면 엎드려 그림을 그리곤 햇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림이 한없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소풍을 가서도 서공임은 그림만 그렸습니다. 친구들이 숲속을 목청이 터져라 고함치며 뛰어놀 때, 그는 방아깨비며 벌을 잡아 연습장에 그대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코스모스도 그렸고요. 스케치북도 귀한 시절이라 누런 갱지며, 연습장이 그의 ‘화폭’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는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습니다. 사방에 외국서 공부하고 돌아온 작가들이 흘러넘치고 있으니 그의 아킬레스건입니다. 그래도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연마했습니다. 

서공임 ‘재화만발’(50×70㎝,부분) 종이에 수간분채, 2010

어린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민화는 그와 인연이 길고 깊습니다. 마을 전통혼례나 굿, 장례 때마다 등장하던 병풍 속 민화는 지금도 눈에 어른거립니다. 그 민화는 어린 시절 벽장 앞에 붙여져 있던 그림과 일맥상통한 그림이었습니다.

서공임은 “김제에는 벼농사를 많이 짓는 부잣집이 있었는데 그런 집에선 ‘환쟁이’를 한달쯤 머물게하며 그림을 그리게 했죠. 저희 집도 한점을 받아다가 벽장에 붙였더랬어요. 그 그림이 바로 민화였죠. 지독히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예술은 그렇게 우리 생활 속에 있었습니다. 크게 욕심내지 않는 마음에서 소박하게 그린 그림이라 더 정겨운 그림이었고요” 

그렇게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던 그는 열아홉살이 되던 해, 평소처럼 그림 그릴 재료를 사러 화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포스터를 맞닥뜨렸습니다. 민화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포스터였죠. 그리곤 그의 인생이 민화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무작정 전화를 걸고, 찾아갔지요. 어릴 때 많이 봤던 그림이라 안심도 되었으니까요. 이튿날부터 곧바로 출근해 화실청소를 해가며 도제식으로 민화 작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동양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민화가 적성에 맞았어요. 그리고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진득하게 뭔가에 몰입하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더 제격이었어요. 그렇게 7년간 전통민화를 수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통을 반복적으로 임모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자신만의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곤 1996년, 생애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기에 이릅니다.

사공임은 말합니다. ”저는 전통을 계승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제 이 시대와 맞는 민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거공간도 과거의 한옥에서 이제는 대부분 아파트며 빌라로 변했잖아요? 새로운 공간에 맞는 새로운 민화가 더 많이 나와야 할 때죠. 민화에도 혁신이 필요하고, 새로운 디자인 감각이 필요합니다”

서공임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50×70㎝,부분) 종이에 수간분채, 2010

그래서 사공임은 요즘 전통민화 속 이런 저런 모티프를 따와, 독특하게 재구성한 민화를 즐겨 그립니다. 재료도 한지만이 아니라 스테인리스 스틸 판에 자동차도료로 그려보기도 하고, 서양 캔버스의 표면을 특수처리해 수간분채로 그리기도 합니다. 프레스코화도 시도했고, 심지어 커피로 그린 적도 있습니다.

재료가 무엇이 되었더라도 민화는 공력이 매우 많이 들어가는 그림입니다. 게다가 서공임은 완벽함을 쫓는 성격 탓에 고생을 사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민화는 그림 그리는 시간 보다, 밑작업에 들어가는 시간이 더 요구됩니다. 그는 필요한 색가루를 직접 빻고, 체로 걸러냅니다. 이렇게 곱게 만든 분말을 아교와 섞어 부드럽게 갠 다음, 종이에 여러 번 정성껏 입혀가며 바탕을 만들어야 밑작업이 비로소 끝납니다.

그 다음에도 꽃 한송이, 새 한마리에도 수백, 수천여 개의 점을 찍어야 하고, 수만 개의 선을 끝없이 그려야 합니다. 어찌보면 인내심 싸움이자, 엉덩이 싸움이지요. 그는 “주위에서 조수를 쓰라고 하지만 성에 차지않아 모든 과정을 직접 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교육을 많이 받았다면, 다른 재능이 있었다면 아마도 민화작업을 진작에 그만 두었을 겁니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이젠 온몸이 안 쑤시는데가 없거든요. 그야말로 등골이 휘고, 삭신이 쑤시는 작업이지요”라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공임은 민화가 한없이 좋다고 합니다. 게다가 국내는 물론이고 폴란드, 중국, 프랑스, 헝가리,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그를 끝없이 불러주니 힘 닿는데까지 작업하며, 전시회도 이어갈 생각입니다. 그간 해온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도 계속할 참이고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식 때 이희호 여사가 입었던 한복의 무궁화그림도 서공임이 그렸고, 패션디자이너 이영주 장광효 씨와도 여러차례 협업했답니다.

“외국에서는 전시 뿐 아니라, 체험행사를 꼭 해달라고 해요. 에코 백이나 부채에 민화를 그려주면 너무나 좋아합니다. 몇시간씩 기다리며 제가 그려준 부채 등을 받아가곤 하지요. 지난 2012년에는 아르헨티나와의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서전에 한국관이 세워졌는데 그곳에서도 전시를 열며 그림 시연을 했어요. 반응이 무척 뜨거워 가슴이 뭉클했지요. 지구 정반대편의 사람들이 한국의 예술과 정서에 이렇게 열광하는데 정작 우리 안방에선 민화가 서양그림에 비해 너무 홀대받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우리 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우리의 고유한 정서에 기반한 우리 그림들(한국화며 민화 등등)은 전시도, 판로도 너무 좁은 게 현실입니다”.
 
새로운 작품 앞에 선 서공임 작가.

이렇게 안타까움을 피력한 서공임은 3년 만에 다시 국내 개인전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5일 ‘민화에 홀리다’란 타이틀로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의 롯데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3월 23일까지)에는 보다 현대적으로 산뜻하게 재해석한 현대민화들이 내걸렸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결혼 축하드려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등의 제목은 옛 민화의 주제를 쉽게 풀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총 출품작은 54점으로, 작품값은 400만원대라네요.

서공임의 민화는 명품관인 에비뉴엘 각층에도 걸렸습니다. 특히 에비뉴엘 1층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가로 6m의 대형 모란도가 설치돼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서공임이 그린 민화를 만나러 외출을 하면 어떨까요? 참,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02)726-4456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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