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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의 순환과 채움 그리고 비움의 순간
백남준아트센터 ‘달의 변주곡’ 기획전
시간의 속성 탐색한 백남준作
‘달은 가장 오래된 TV’서 모티브
한국 · 일본 · 벨기에서 작가 7명 초청
시간성에 대한 다양한 작품 소개


1965년 어느날, 백남준은 물었다. “예술은 무엇일까요? 달(月)인가요? 아니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까요?”

뉴욕의 보니노갤러리에서 이 괴짜 예술가는 ‘시간의 속성’을 달과 TV로 은유한 설치작업을 선보이며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구식 진공관TV에 자석을 갖다대어 하늘의 달이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이어지는 과정을 표현했다. 시간의 흐름을 공간 속에 재현한 이 작품은 당시로선 더없이 획기적인 실험이었다.

음과 양 중 음(陰)을 상징하는 총체이자 동양의 정신성과 초월성을 함축하는 달을 통해 백남준은 순환하는 자연의 시간과, 이와 어우러지는 인간의 삶, 예술의 본질에 대해 흥미로우면서도 예리한 성찰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설치작업은 그의 대표작이 됐고, 다양한 방식으로 업그레이드되며 세계 주요 미술관을 순회했다. 

 
40년전 그 누구도 상상 못했던 예술실험을 실현한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TV’(2010). 보름에서 그믐으로 변하는 달을 비디오아트로 구현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백남준이 보름달 안에 떡방아 찧는 토끼와 계수나무가 있다고 믿는 한국의 전승동화를 연상하면서 인간의 상상력을 투사한 달과, 현대 테크놀로지를 결합한 작품을 제작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상상을 달에 투영하던 전자시대 이전의 삶의 풍경과, 달의 변화라는 시간의 흐름을 결합하면서 시각예술의 신천지를 활짝 열어젖힌 셈이다.

백남준의 작품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모티브로 한 전시가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관장 박만우)에서 개막됐다. ‘달의 변주곡’이라는 타이틀로 6월 29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는 각국의 현대미술가가 ‘시간성’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매체로 탐구한 재기발랄한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꿈꾸는 작가의 사유를 엿보게 하는 안규철의‘ 하늘자전거’. 안규철은 푸른 하늘 그림을 실은 이 기발한 자전거가 도심을 달리는 모습을 영상에 담기도 했다.

광속으로 치달리는 현대의 관객에게 차분한 ‘쉼표’를 선사하기 위해 기획된 이번 전시에는 한국ㆍ일본ㆍ벨기에 등에서 모두 7명의 작가가 초대됐다. 물론 고인인 백남준도 ‘달은 가장 오래된 TV’(2000년 버전)로 참여했다. 출품작 중에는 관객 참여로 완성되는 작업이 있는가 하면, 작품 밑에서 차분히 명상에 빠져보도록 한 작업도 있는 등 편안함 속에서 시(詩)적인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작가들은 오늘 이 속도와 물량의 시대에 느릿느릿 ‘시간의 순환’과 ‘채움과 비움’을 생각해보라고 속삭인다.

안규철(59)은 푸른 하늘이 그려진 그림을 싣고 달리는 ‘하늘자전거’를 설치했다. 그 옆에는 전시장의 조명을 거울로 반사시켜 어두운 벽면에 모은 ‘달을 그리는 법’이란 작업이 어우러졌다. 어린이가 돋보기놀이를 하듯 빛을 모아 전시장에 달을 띄운 작업으로, 기울고 차며 우리 곁을 지키는 달처럼 켜켜이 쌓여가는 일상의 소소한 시간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것임을 일깨운다.

독특한 그림자 작업으로 잘 알려진 료탸 구와쿠보(43)는 검은 실내에 작은 모형기차를 달리게 하고 있다. ‘Lost #9’이라는 공간 설치작업은 레일 위를 천천히 달리는 미니기차가 백열등, 빨래집게, 바구니, 삼각자 등 일상의 오브제를 비추면서 벽에 대단히 몽환적인 풍경을 드리운다. 빛을 품은 그림자가 만드는 아늑한 흑백의 도시풍경은 태초부터 있었던 밤의 환영을 떠올리게 한다.

영상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순간의 시간을 정교하게 조각하는 다비드 클라르바우트(45)의 작업도 흥미롭다. ‘일터에서 돌아오는(나이지리아 쉘컴퍼니) 정유노동자’라는 작품에서 작가는 폭우를 피해 교각 아래에 잠시 멈춰선 노동자의 모습을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영원의 시간’으로 바꿔놓았다. 실제보다 더 사실적인 가상의 이미지를 통해 허구의 시간을 곱씹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어두운 공간 속 빛을 발하며 달리는 미니기차가 전구를 비추자 거대한 돔형 건축물같은 환영이 드리우고 있다. 소박한 일상의 기물을 활용한 료타 구와쿠보의 설치작업‘ 로스트#9’ (2013). 묘한 환영이 관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조소희(43)의 ‘...어디...’는 이번 전시에서 공력이 가장 많이 들어간 작업이다. 작가는 미술관 천장과 벽에 녹색의 실을 한 땀 한 땀 엮어 공간을 직조했다. 관객은 수행하듯 가는 실을 끝없이 이어간 작가의 노동이 이토록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냈음에 찬탄을 머금게 된다. 공간과 공간 사이를 실로 연결해 채운 작품 아래에는 명상을 위한 의자가 비치돼 있다.

뉴타운 공사로 사라져가는 월곡동을 오랜 시간 촬영해 그 장소가 지닌 시간성을 드러낸 안세권(46)의 사진도 나왔다. 그의 아련한 사진은 기다림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박만우 관장은 “이번 ‘달의 변주곡’은 현대미술이 어렵고 낯설다는 편견을 넘어, 예전에 달을 지긋이 바라보며 가졌던 관조의 시간처럼 작품과 차분히 마주하며 즐겁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제공 백남준아트센터]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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