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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그들의 오늘을 만든 건 8할이 ‘재수’ 였다…명사들 회고담
-4수 장관ㆍ재수CEO…그들의 성공엔 ‘재수’의 거름이 있었다

[헤럴드경제=박수진 기자] “CEO나 장관까지 하신 분들이면 능력 뿐 아니라 운도 타고난 분들인데, 재수나 삼수를 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모 대기업 과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셔 본 명사들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던 중 ‘누구 아는 사람 없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었다. 사실 보통 사람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선망하고 부러워하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설마 실패를 맛봤겠냐고, 백번 양보해서 가난하게 태어날 순 있어도 대학입시에서 낙방의 경험을 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수 장관’에 ‘재수 CEO’까지, 시쳇말로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나는 명사들에게도 ‘재수’의 추억은 있었다. 그 추억은 그들의 오늘을 있게 한 거름이 되기도 했다. 

▶“재수는 나를 단련시킨 힘”=“대학을 4수한 장관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제가 최초일 겁니다.”

이 솔직한 고백의 주인공은 홍석우 전 지식경제부 장관이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공대를 지원했으나 낙방, 재수와 삼수 뒤 응시했던 서울대 법대와 성균관대 법대도 미끄러졌다. 홍 전 장관은 4수 끝에 서울대생이 됐다. 그는 서울대 무역학과 74학번이다. 어찌보면 부끄러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홍 전 장관은 여러 강연에서 자신의 낙방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또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학업과 취업 등으로 지친 젊은 후배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한 때 한강 다리를 떠올린 적이 있었을 만큼 스무살의 그도 적잖은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세 번의 낙방은 홍 전 장관의 삶의 뿌리가 되는 좌우명을 만들어 줬다.

그는 지난 2012년 서울대 공대 특강에서 “내 첫 번째 좌우명은 ‘1등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 최소한 합격은 할 수 있다’라는 것”이라며 “세 번의 낙방을 통해 내가 떨어진 이유는 재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주변의 상황을 탓하기 보다는 냉정하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는 법을 깨달았다.

“무엇을 하든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면 이룰 수 있어요.” 다소 진부한 말일 수 있지만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진부함은 용기로 바뀌었다

▶“재수는 필살기다”= 삼성그룹 인재 양성의 명장으로 회자되는 신태균 삼성인력개발원 부원장도 ‘재수생’ 출신이다. 40만명에 달하는 삼성 직원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으며 삼성그룹 내에서도 최고의 달변가로 평가받을 만큼 화려한 입담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도 한 때는 “공부도, 운동도 못했고 정말 잘하는 게 없었다”고 말할 만큼 열등감에 사로잡힌 청년이었다. 


그를 변화시킨 계기는 재수였다. 대학에 낙방하고 재수를 하던 시기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신 부원장이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도 그 당시 병에 걸렸고 집은 헐려서 신 부원장 가족은 무허가 건물에서 살아가야 했다. “열등감 종합 선물세트를 갖고” 소극적으로 살아가던 당시의 신 부원장은 처음으로 ‘반전’을 준비한다.

그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래선 안되겠구나’, ‘마지막 반전을 가하지 않으면 내 인생은 완전히 무너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1년 공부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2012년 5월 열정락서 강연)”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렇게 시작한 재수는 그의 ‘역전 필살기’를 만들어 준 토양이 됐다. 신 부원장은 1년 간 매일 16시간씩 공부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꾸준함’을 무기로 얻었다. 이후 연세대 법대에 합격했고 삼성그룹에 입사해서도 그의 이 필살기는 늘 위기를 돌파하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재수는 생각지 못한 미래를 열어준 기회”= 재수라는 관문을 통해 생각하지 못했던 미래를 맞은 명사들도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한국홍보전문가’로 인정받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도 그중 하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세계인들에게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홍보전문가인 그도 재수의 쓴 맛을 경험했다.

그의 저서 ‘세계를 향한 무한도전’에 따르면 서 교수는 첫 대학 입시에서 낙방을 경험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가족의 기대에 부응해왔던 터라 미안함은 더 컸다. 그는 1년을 더 공부했지만 본인의 기대에 미치는 결과를 얻진 못했다. 삼수를 결심하던 차에 그의 부모님이 재수를 해서 합격한 학교에 입학하라고 권유한다. 그 학교가 성균관대 조경학과다. 
 

하지만 서 교수는 대학생활에 적잖은 실망을 경험하게 된다. 남들보다 1년 더 힘들게 공부한 만큼 대학생활에 대한 로망이 컸지만 학점 경쟁에 골몰하는 캠퍼스의 모습은 실망감으로 다가왔다. 그 때 운명처럼 만난 것이 대학연합 이벤트동아리 ‘생존경쟁’이었다. 서울시가 600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타입캡슐 안에 넣을 내용물을 공모하는 프로젝트에 선정되며 ‘아이디어맨’의 길을 걷게 된다.

김낙회 전 제일기획 사장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35년 간 한결같이 광고의 길을 걸어온 대한민국 광고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1976년에 제일기획에 입사해 2007년 사장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기존 관습과 격식을 깨는 광고로 세계를 놀라게 한 그지만 그는 광고인을 꿈꾸던 인물은 아니었다. “나의 경쟁력은 열등감에서 출발한다(2013년 열정락서 강연)”고 할 만큼 한 때는 자신감 없는 소년이었다. 


김 전 사장도 재수생 출신이다. 첫 대학입시에서 낙방하고 재수를 해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시골에서 태어나 힘든 형편에 어렵사리 서울로 유학을 왔다. 열심이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대학에서 보기 좋게 낙방을 했다. 재수를 해서 들어간 대학도 소위 말하는 ‘SKY(서울대ㆍ고려대ㆍ연세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적잖은 방황이 있었다. “성적이 안좋아서 학사 경고를 받은 적”도 있었고 “뭘 해도 안되는 것 같아 자포자기한 상태”였을 만큼 마음 고생이 심했다. 하지만 학과 교수의 추천으로 지원서를 낸 제일기획에 운 좋게 합격한다. 성실함과 끈기를 무기로 한걸음씩 내딛은 그는 결국 30년 뒤 제일기획 사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많은 것이 부족하고 열등했지만 끈기와 성실함,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바탕으로 즐겁게 임하다보니 마침내 열등감이 열정의 폭발로 바뀌어 버렸다”고 말했다.

sjp10@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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