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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38년,참 치열하게 달려왔네” 보헤미안작가 최동열의 ‘타임라인’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보헤미안으로서의 삶을 살며 격정적으로 작업해온 화가 최동열(63)이 지난 38년간 작가로서의 궤적을 살펴보는 전시를 꾸민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선(選)갤러리(대표 원혜경)는 ‘최동열의 타임라인’전을 오는 2월 26일 개막한다.

이번 ‘최동열의 타임라인, 1977~2014’전(展)은 최동열이 미술을 시작한 지난 1977년부터 오늘날까지 매순간 치열하게 달리며 작업의 변화를 꾀해온 과정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다. 시기별 대표작들이 모두 망라돼 일종의 중간회고전에 해당되는 이번 전시에는 유화, 드로잉, 판화, 밀랍 작품 등 50여 점이 전시된다.

아울러 히말라야에 머물며 작업한 최근의 작업도 여러점 포함됐다. 예술로 승화된 작가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과, 예술혼을 작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최동열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파격적인 구도가 특징이다. 상징과 풍자, 에너지와 역설로 가득찬 그의 그림은 인간의 폐부를 여지 없이 찌른다.
이렇듯 인간의 원초적 심성을 드러내되, 이를 시니컬하면서도 압축적으로 드러낸 작업들은 더없이 생생하고, 자유분방하다. 40년에 가까운 최동열의 작품세계는 한가지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기운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차 있는 작품도 여럿이다. 이는 곧 나른하게 ‘고여있는 물’이 되기 보다는, 폭포수처럼 콸콸 흐르는 삶을 꿈꾸는 작가 자신의 심상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작가 최동열은 그 어떤 작가보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작가다. 한 곳에 안주하길 거부하는 그는 숱하게 많은 곳을 오가며 삶에 있어 구비구비 곡절도 많았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을 오가며 유목민임을 자처하는 작가들은 많지만, 최동열이야말로 일찌기 1970년대부터 유목민 작가로, 거칠고 외롭고 힘든 유랑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밑바닥 삶과 극한의 과정을 통과했던 숨막혔던 과정이 그에겐 창작의 자양분이자, 화수분이 되었다. 작가는 “나처럼 전세계 곳곳을 오가며, 보따리를 수없이 쌌다가, 풀렀다가 한 작가도 드물 것”이라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로서 지난 38년의 작업을 정리하고, 돌아봤는데 참으로 치열하게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밝혔다.

그는 지구촌 곳곳을 오가며 여행객이 아닌 현지 주민으로 살길 고집한다. 스스로를 ‘홈리스’(homeless)라고 칭한 작가는 지금도 고정적으로 사는 집이 없다. 집이며 가재도구 등으로부터 자유로운채, 낯선 곳에서 장기간 머물며 작업하는 고단한 삶을 육십이 넘은 지금도 계속해오고 있다. 참으로 못말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동열은 “거기 살았다는 게 중요할 뿐, 집은 내게 별반 의미가 없다”며 “최근에는 히말라야를 수차례 찾아 그곳에서 머물며 작업하고 있다. 정말로 기막힌 곳이다. 오는 10월에 또다시 히말라야로 떠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폴 세잔이 엑상 프로방스의 자기네 동네 산인 생 빅트아르 산을 그렸듯, 나도 산이 내 작업의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 히말라야에 가면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한편 그는 자신의 지난 삶을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분했다. ‘파란만장한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인생역정이자, 괴짜 작가로서의 자유로운 영혼의 궤적이어서 소개한다.

▶베트남전에서 경험한 극한의 세계, 밑바닥 직업 전전했던 인생초반기(1951-1976년)=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난 최동열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 해 명문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정치에 꿈을 두었던 그는 경기고 진학에 실패하자, 검정고시로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생활이 기대에 못 미치자 1년반 만에 때려치고,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다. 군생활 1년 후 베트남전쟁에 첩보대원으로 지원해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의 부패, 인간의 잔인성, 삶의 신비, 극한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된다. 이 때 겪은 전쟁의 어두운 뒷면과 생명의 존귀함, 인간의 실존은 이후 그의 작품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제대 후 미 국무성 초청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유니온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워낙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그는 세속에서의 출세에 흥미를 잃고, 모든 걸 내려놓고 만다. 플로리다에서 공장노동자, 유도와 태권도사범, 술집 문지기, 바텐더를 전전하며 술과 마약에 빠져들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어느 날, 그는 정신을 차리고 영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유로운 영혼, 보헤미안으로 살다 (1977-1987)=1977년 뉴올리언즈에서 외롭게 살고 있던 때, 지금의 아내이자 평생동지인 엘디(L. D.로렌스)를 만난다. 그림을 그리는 엘디 옆에서, 최동열은 붓글씨 연습을 하곤 했다. 어느 날, 그는 그림이 너무나 그리고 싶어져 정육점에서 고기를 싸는 긴 종이(길이 100m)에, 뛰는 말을 그리기 시작했다. 말 그림을 필두로 미술계에 입문한 최동열은 여성의 본성을 강렬하고 시원하게 투영시킨 판화작품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그 뒤로 본격적인 유화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이후 뉴올리언즈를 떠나 미국 서부, 남부와 멕시코를 떠돌며 문명세계와는 거리가 먼, 원시적 수렵생활을 하며 작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이 상업적으로만 이용되는 상황에 크게 회의를 느끼고, 예술가로써 한동안 방황하게 된다. 그리곤 자연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에서 뉴욕을 떠나, 인적이 없는 멕시코 유카탄 코바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스스로를 되찾은 그는 신들린 무당처럼 작업하며 대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완성된 대작들로 세계적인 작가들이 운집해있는 뉴욕의 이스트빌리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곧바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세계 각지를 유랑하며 고독하고, 힘든 생활을 겪으면서도 폭력과 공포마저도 아름답게 승화시킨 그의 그림은 평론가들로부터 열띤 호평을 받았다.

▶예술의 혼을 찾아 떠난 여정(1987- 1992)= 미국 무대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나 그는 이를 뒤로 하고, 1987년, 도미(度美) 1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 자신의 화두였던 ‘한(恨)’을 만나기 위해 아내와 10개월 된 딸을 데리고 전남 해남과 진도 여귀산 기슭 탑리에서 생활하며 작업하기 시작했다. 특히 진도는 바다와 산, 하늘과 바람, 무수한 별들이 있어 미국서도 보기 드문 곳으로, 한국적 정서가 스며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최동열은 예술을 통한 동서양 만남을 시도하며, 초인 시리즈, 진도의 장례식 풍경 연작을 쏟아냈다. 또 한국의 정치, 사회적 모순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업도 시도했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뉴욕과 워싱턴주 올림픽반도를 오가며 작업했다. 미국 서북부에 있는 염소농장에 매료돼 연어 낚시, 등산, 정원 가꾸기를 하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중국의 우루무치, 돈황, 나주, 서안을 비롯해 티벳, 네팔, 인도의 시킴 라다크 등을 답사하며 동서양 예술의 융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 연작인 ‘안과 밖’ 시리즈는 1984년 멕시코 유카탄반도를 여행하며 길에서 바라보던 실내를 작품으로 옮긴 것이다. 이후 1996년, 올림픽반도 작업실에서 작가는 한국에서의 삶을 회상하며 한국의 이불, 요, 베개, 장, 화장대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깥풍경을 배치하며 한국의 정서를 담았다. 


▶동과 서, 안과 밖을 넘나든 그, 이제 히말라야를 그린다(1998~2014)= 이후 뉴욕으로 이주한 작가는 1998~2000년에는 뉴욕의 야경을 작품의 배경을 삼았다. 2001년부터는 동양화로 처리된 산수와 올림픽반도의 작업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수를 실내 정물과 배치했고, 2004년에는 경기도 이천에 거주하며 한국 산수를 배경으로, 도자기와 누드를 연결시키도 했다.

이후 거처를 옮길 때마다 그곳의 정서를 바탕으로 도시와 정물, 누드와 자연을 배치해 ‘안과 밖’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다. 근래에는 신들이 거주하는 성스런 산,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의 초월적 정신세계를 화폭에 표현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 가천대 교수는 “최동열은 화가 입문에 앞서 독특한 체험을 한바 있다. 전쟁 체험(베트남전)이 그 첫째이고, 그 다음이 초기 미국 정착시절의 직업편력이다. 자동차부품공장 노동자생활을 비롯해 술집의 바텐더, 태권도 사범까지 다양한 밑바닥 체험은 그에게 창작의 샘물로, 청량수로 넘쳐흘렀다. 서울에서 곱게만 살았다면 결코 경험해 볼 수 없는, 다양한 편력이다. 이는 예쁘고 여린 장식적인 그림과 거리를 두게 했다”며 “사물과 대상의 특성만을 포착해 화면 가득히 강조하는 최동열의 그림은 거칠고 운동감있는 붓질이 주제의식을 분명히 부각하고 있다"고 평했다. 최동열 작품전은 3월11일까지 계속된다. 02-734-0458.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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