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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수근 그림값’의 진실…60년대엔 고작 20~50달러, 미국인만 매입해…
[헤럴드경제= 이영란 선임기자] 시골집 토담처럼 질박한 마티에르(표면의 질감)로 1950~60년대 한국 서민의 삶을 성실하게 그려냈던 화가 박수근(1914~1965). 그의 그림은 언제 봐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올해는 마침 이 국민화가의 탄생 100주년인 해다. 이를 기념해 그의 유화 90점과 수채화ㆍ드로잉 등 120여점이 서울 관훈동 가나인사아트센터(~3월17일까지)에서 전시되고 있다.

강원도 양구 깡촌 출신에,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이 서민적인 화가는 이 땅에서 ‘그림값이 가장 비싼 작가’이기도 하다. 가나아트갤러리(대표 이옥경)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전시 출품작의 총 가격은 1200억원이 넘는다. 그의 유화 ‘빨래터’가 세운 경매 최고낙찰가 45억2000만원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50년 전만 해도 20~50달러에 불과했던 그의 그림은 도대체 왜 이렇게 비싼 것일까? ‘박수근 그림값의 진실’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박수근 노상(1957년 작). 1960년대 짐머맨 여사가 소장했던 작품이다. [사진제공=가나아트]

▶격변기 우리네 삶을 진솔하게 담았기에 더 가치 있어= 지금에야 그가 ‘국민화가’로 불리지만 박수근은 살아생전 개인전 한 번 가져보지 못했던 불운한 화가다. 작가가 1965년 타계하고 나서야 비로소 회고전이 열린 바 있다. 오산의 주한 미(美)공군사령부 도서관에서 1962년 약식으로 그림을 내건 게 전부다. 국전(國展)에서도 기대했던 입상을 못하는 바람에 작가는 낙담한 나머지 폭음을 거듭했다. 간경화로 쉰하나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러나 과묵하고 신실했던 그는 선한 마음으로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매일매일 붓을 잡았다. 화가의 장남인 박성남 씨(화가, 67)는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시곤, 그림 앞에 앉으셔서 해질녁까지 진종일 작업에 매달리셨다. 그리곤 저녁이면 막걸리 잔을 기울이셨다. 그림이 팔리든 안 팔리든, 남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개의치않고 커다란 손으로 한땀 한땀 수놓듯 정성껏 그림을 그리셨다. 그러나 철부지였던 내겐 팔리지도 않는 아버지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뭇잎 하나 안 달린 무채색의 나무도 그렇고, 눈 코 입이 생략된 인물화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내게 아버지는 그림도 별로 못 그리고, 무위도식하는 사람으로 비쳐졌다”고 회고했다. 

박수근 고목과 행인(1960년대).[사진제공=가나아트]

하지만 아들은 “이제는 비로소 느낀다. 아버지 그림의 소중함을.. 격변기 우리의 궁핍했던 삶을 정직하게 담았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그림하는 사람으로써 애국한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박 화백이 겨레의 고단한 삶을 차분한 어조로 가감없이 화폭에 새겨넣었기에 우리는 50, 60년대 우리네 삶을 반추할 수 있다.

자신의 삶과 예술이 하나처럼 일치했던 박수근의 인생역정은 숨가쁘게 달려가는 이 ‘광속(光速)의 시대’에 우리가 잊어선 안될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운다. 그의 덤덤한 그림에서 경건함과 숭고함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적 아이콘’이자, 따뜻한 아랫목처럼 푸근한 그림이기에 그의 작품을 수집하고자 하는 미술관이며, 컬렉터는 많이 늘었다. 작품값이 계속 상승하는 이유다.

하지만 생전에 작가는 그림이 안 팔려 늘 가난했다. 기껏해야 엽서, 공책 크기 소품들이 한국을 찾았던 미군 등 외국인들의 기념품으로 이따금 팔렸을 뿐이다. 당시 국내 미술시장에선 동양화가들의 수묵산수화가 대세(?)였던 탓이다.

박수근 귀로(1964). [사진제공=가나아트]

박수근은 작업실도 따로 없이, 창신동 집 대청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다. 지금도 전해지는 흑백사진 속의 이 키 큰 작가는 대작들을 뒤로하고, 아내및 딸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소품들은 간간이 팔렸지만 대작은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겠다는 이들이 거의 드물었다. 그나마 그의 생계를 잇게 해준 이들은 몇몇 눈 밝은 미국 여성들이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와 서정, 특이한 조형기법을 높게 평가한 이들이 그의 후원자였다.

특히 주한 미대사관 문정관의 부인이었던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 여사는 한국적 정취가 진득하게 배어 있는 박수근 그림을 각별히 좋아해 30여 점가량 수집했다. 박수근 그림의 최대 개인소장자였던 밀러 여사는 한국 근대기 미술시장의 ‘외국인 투자자 1호’였던 셈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편을 따라 서울에 와 있던 밀러 여사는 박수근의 그림들이 내걸려 있던 을지로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내 반도화랑에 자주 들러, 박수근의 그림(유화)을 종종 샀다. 여사는 작가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자 주위 사람들에게도 작품 구입을 적극 권했다. 

반도호텔 내에 사무실이 있던 미국인 존 닉스 씨가 구입했던 ‘시장사람들’.[사진제공=가나아트]

1960년대 초까지도 박수근의 소품은 불과 20달러 선이었다. 그림이 서류가방에 쏙 들어가는 크기인 것도 한국 체류 기념으로 가져가기에 제격이었다. 조금 큰 작품도 50달러에 불과했다. 쌀 두세 가마니 값이면 박수근의 제대로 된 유화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박수근의 그림은 호당(엽서 크기) 2억~3억원, 중간 크기 작품이 30억~50억원을 호가하니 그 상승폭은 놀랍기 짝이 없다. 대작이며 대표작의 경우는 값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다(특히 대표작은 이미 주요 미술관 등에 소장돼, 미술시장에 다시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고국인 미국에 돌아가서도 밀러 여사는 매달 50달러, 100달러씩을 송금하며 박수근 작품을 지속적으로 수집했다. 박수근은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림값 50달러 대신 물감을 사서 보내달라. 나는 주로 흰색 물감을 쓰니, 흰색 유화물감을 사서 보내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히기도 했다. 그만큼 국내에선 양질의 유화물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해지는 밀러 여사의 거실 사진에는 벽난로 위에 나란히 걸려있는 박수근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의 미술저널에 박수근을 소개했으며, 미국 미술관 전시 등에 출품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 20∼50달러였던 그림, 이젠 수억, 수십억원대=밀러 여사가 40, 50달러에 샀던 그림은 지난 2001년 국내 경매에선 5억원에, 2002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선 7억5000만원에 팔린 바 있다. 물론 10여년이 지난 요즘은 이보다 가격이 훨씬 더 상승했다.

밀러 여사가 수집했던 그림은 이제 모두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난 1979년, 박수근의 부인이었던 김복순 여사는 동숭동에서 두손갤러리를 운영했던 김양수 대표와 함께 미국으로 밀러 여사를 찾아갔다. 박수근 회고전을 열기 위해서였다. 그리곤 여사가 보유했던 작품 30여점을 인수했다. 그무렵 국내에서 서양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박수근 작품은 수요가 급격히 늘었다. 1979년 두손갤러리에서 회고전이 개막되기도 전에, 미국서 가져온 그림은 유력 컬렉터 등에 모두 팔리고 말았다. 그 전까지 300만원이었던 호당 가격도 전시를 기점으로 600만~700만원으로 수직상승했다. 그야말로 하룻밤 새에 가격이 두 배나 뛴 것이다. 

박수근 화백이 1959년 서울 창신동 집 마루에서 부인, 딸과 포즈를 취했다. 대청마루에는 그가 그린 대표작들이 겹겹이 놓여 있다.


주위에선 ‘한꺼번에 너무 올린다’고 원성이 자자했다. 작품은 한정되고, 사겠다는 이들은 줄을 섰으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후로도 박수근 작품값은 매년 꾸준히 올라 현재 호당 2억~3억원대를 기록 중이다. 박수근 작품에 일찍 눈을 돌린 수집가로선 더없이 실속 있는 투자였던 셈이다.
그 후 밀러 여사의 수집품은 일부는 미술관에, 일부는 기업에, 일부는 개인으로 손바뀜이 이뤄졌다. 여사의 보유작은 경로가 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높게 평가되곤 한다.

박수근의 또 다른 후원자로는 주한 외교관 부인들의 모임을 이끌었던 셀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 여사가 꼽힌다. 짐머맨 여사 또한 박수근 그림을 5, 6점 보유했다. 이 밖에 반도호텔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았던 존 탐(3점), 반도호텔 내에 사무실이 있었던 존 닉스(6점) 씨 등 박수근 작품의 외국인 주요수집가는 10명 선으로 파악된다. 모두 미국인인 것이 공통점이다. 총 350~370점으로 추산되는 박수근의 유화는 이제 20점 정도를 제외하곤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파악된다. 전세계적으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외국(특히 미국) 곳곳으로 퍼져있던 박수근 그림은 뒤늦게 가격을 확인한 가족들의 제보로 경매및 딜러를 통해 한국으로 다시 유입된바 있다.

어떤 이들은 “박수근 작품 값이 그렇게 비쌀 필요가 있느냐?” “뉴욕경매에서 비싼 값에 되사오는 것은 결국 미국인들 좋은 일만 시키는 거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제 대접을 못 받았기에 박수근 그림은 해외로 유출됐던 것이다. 눈 밝은 컬렉터, 문화애호가들이 그의 그림이 좋아, 또는 작가를 후원하기 위해 작품을 하나둘씩 사들였다가 이를 되팔아 큰 돈을 벌었다면 이는 ‘안목에 대한 대가’이다. 게다가 자칫하면 소실될 수도 있었을 작품을 잘 보관해, 오늘로 전해지게 한 점 역시 평가받을 일이다.

우리 주식시장에서도 이제 외국인 투자자들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미술시장은 이미 50여년 전부터 외국인 투자자들이 제법 있었던 셈이다. 물론 요즘도 외국인들에게 더 잘 팔리는 우리 작가의 작품이 부지기수다. 글로벌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될성부를 새싹을 잘 찾아내, 이를 꾸준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작가의 성장을 함께 지켜볼 때 아트 컬렉션은 ‘뜻밖의 가치’를 컬렉터에게 안겨주곤 한다. 단 미술품 수집은 돈이 우선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주목하는 게 우선임은 동서고금 변치 않는 불문율이다. 돈이 목표인 ‘성마른 투자’는 감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으며, 실패확률도 높을 뿐이다.
 
[사진제공=가나아트]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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