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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룡사거리는 ‘강남스타일’…세계 5대도시 서라벌의 추억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경주 인구는 현재 26만3000명을 조금 넘는다. 안강,외동,현곡 등 옛 월성군 지역을 제외하면 순수 경주 인구는 15만명 정도이다. 도심은 경주시청을 중심으로 형성돼 북으로는 포항에 인접한 안강까지 이어지는데, 남쪽으로는 북천(北川)에 이르러 딱 끊긴다.

북천은 이상하다. 도심 남쪽에 있으니 남천이라 할 법한데 북천이라 부른다. 북천 아래는 동쪽의 토함산, 남쪽의 남산, 금오산, 서쪽의 선도산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평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엔 논밭 사이사이로 문화유적들만 즐비한채 민가가 많지 않다. 도시남쪽을 북으로 부르는 이유 그것을 알고싶다.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문희에게 팔아넘긴 꿈속에서 소변을 본 산이 선도산인데, 지금 도시 형세로 보면 아녀자가 저토록 외진 곳에 가봤을까 싶다.

▶경주 동궁월지(임해전지)의 노을- 경주시 제7회 사진전 입상 박정란 作, <경주시 사용 허가 및 제공>

 ▶경주 도심 남쪽 강이 왜 북천?

고려의 승려 사학자 일연은 삼국시대 역사를 정리하면서 “신라 전성기에는 서라벌에 17만8936호가 있고, 35개의 금입택(金入宅:황금을 입힌 집)이 있었다”고 썼다. 당시엔 가구당 자녀가 보통 셋 이상이었으니, 5인가족으로만 잡아도 89만4680명이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금의 3.4배이다. 가구당 평균 6인가족이라면 100만명을 넘는다.

지금부터 1300~1400년전 통일신라 시대 북천 이남 지역에 엄청난 크기의 도심이 있었음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경주 남산 신선암 일출- 경주시 제5회 사진전 금상 박영희 作, <경주시 사용 허가 및 제공>

일연보다 100년 가량 앞선 12세기 모로코 출신 아랍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1154년 신라를 포함하는 세계지도를 그려넣은 ‘천애 횡단 갈망자의 산책’이라는 저서에서 “그곳을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다. 그 가운데서 금은 너무나 흔해, 심지어 개나 원숭이의 목을 묶는 줄도 금으로 만든다”고 기록했다. 알 이드리시 이전인 851년에도 아랍 사학자 술라이만이 신라를 기술했고, 966년 무슬림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는 “신라는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다”고 묘사한다.

7~9세기 흔적을 찾아 처음 도착한 곳은 불국사역에서 2㎞가량 떨어진 원성왕릉, 괘릉이다. 798년 숨진 그의 능은 페르시아 무인 둘과 이국풍의 문인석 2개가 호위한다. 무인석 엉덩이 쪽에는 페르시아 무장 상인들이 차는 주머니(鞶囊:반낭)가 달려있다.

▶피라미드를 닮은 구정동 방형분

불국사에서 경주코롱호텔쪽으로 나와 3.7㎞쯤 가면 구정동 대로변에, 국내에서 보기드문 정사각형 묘지(방형분)를 발견할 수 있다. 한 변의 길이가 9m짜리인데, 2.7m 높이의 봉분 꼭대기가 뾰족해 피라미드를 닮았다. 무덤의 규모로 미뤄 지역 유지급인 듯 하다. 경주시청 이혜련 학예사는 “네 모서리 우주(隅柱:귀에 세운 기둥)중 하나에 서역인 호위무사의 모습이 부조돼있는데, 지금은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겼다”면서 “당시 신라가 좋아 정착하는 페르시아인들이 적지 않았고, 왕실과 귀족은 덩치 크고 용맹하며 충직한 서역인들을 참모로 두는게 유행이었다고 기록한 사서들이 있다”고 전한다. 일부 향토사학자는 이 무덤 자체를 서역인이 설계했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경주 구정동 방형분 - 네모서리 우주 중 하나에서 격구 스틱을 든 서역인의 모습이 부조돼 있었다. <함영훈 기자>

 구정동에서 북서쪽으로 7번국도를 따라 8㎞쯤 가면, 북천을 2㎞가량 앞두고 안압지를 만나게 된다, 안압지는 벌써 10번은 온 것 같다. 관광가이드는 그런데 자꾸만 ‘임해전지(臨海殿址)’ 또는 ‘동궁월지(東宮月址)’라는 생소한 이름을 부른다. 안압지는 방치되던 조선시대 ‘기러기와 오리만 논다’는 폄훼하는 뜻으로 붙인 명칭이라, 원뜻을 찾아 바꾸었다는 것이다. 보통 인도,페르시아,중국 쪽 외교사절, 귀족, 대상(大商)들은 개운포(지금의 울산신항 처용리일대)나 감포를 들어오는데 임금이 바닷가에 직접 임해 영접해야 하지만, 직접 가기 어려울 때가 많으니 마음은 바다에 임하고 이곳에서 모시겠다는 뜻이란다. 황궁인 월궁 동편에 있는, 연못에 비친 달이 아름다운 외국손님 접대장소인 것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중 인동당초(덩굴)문양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양과 일치한다.

▶경주 구정동 방형분(사적 제27호)에서 발견된 서역인 부조 우주석 <경주시 제공>

▶신라에도 외국 손님과의 ‘러브샷’ 있었다.

동서양의 오피니언리더들은 이곳에서 격의 없이 놀았던 흔적이 있다. 술마실 때 내리는 명령을 담은 주사위 즉 주령구(酒令具) 놀이이다. 술마시기전 14면체의 주사위를 던지면 명령어가 나온다. ‘노래없이 춤추기’(禁聲作舞:금성작무), ‘얼굴 간지러움을 태워도 참기’(弄面孔過:농면공과), 술 석잔을 한번에 마시기(三盞一去:삼잔일거),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任意請歌:임의청가), ‘여러 사람 코 때리기’(衆人打鼻:중인타비) 등에다 요즘의 러브샷인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曲臂則盡:곡비즉진)까지 있다. 얼마나 즐거웠을지 상상이 간다.

▶경주 98호 남분에서 출토된 로만 크리스탈 유리잔 <문화재청 제공>

임해전지에서 1㎞떨어진 대릉원에서는 5~6세기경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만들어진 인면유리구슬과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의 커트글라스(cut glass:무늬를 새겨넣은 유리)가 발견된다. 인도와는 일찍이 교류했음을 보이는 흔적도 있다. 삼국유사는 “573년 3월 인도 아소카왕이 보낸 편지와 함께 황금과 황철이 가득 실린 배가 울산에 도착한다. 왕의 친서에는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했으나 여의치 않아 황금과 황철을 보내오니 인연있는 그곳에서 ‘장륙존상(丈六尊像)’이 되길 기원합니다’는 내용이었다”고 적고 있다. 배 닿은 곳엔 인도의 동쪽이라는 뜻의 동축사(東竺寺)‘가 세워진다. 장륙존상은 황룡사에도 있었다.

▶조지 부시를 닮은 흥덕왕릉 페르시아인 석상

차를 몰아 북천 다리는 넘어 포항쪽으로 30분쯤 가다보면 안강읍 북서쪽 어래산 자락 흥덕왕릉에 도착한다. 괘릉 부터 이곳까지 거리는 40㎞나 된다. 경주는 서울 면적의 2배를 넘는다. 흥덕왕릉을 지키는 무사 석상 역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빼닮은 페르시아인의 모습이다. 부인 장화왕비만을 사랑했던 순애보, 흥덕왕 재임중 서라벌엔 외제품이 범람하고 사치가 하늘을 찌른다. 흥덕왕은 843년 해외명품 수입을 금지했다고 한다.

▶경주 흥덕왕릉 무인석상 사적 30호- 조지 부시 전 미국대통령을 닮았다. <경주시 제공>

여러 무덤들에서 발견되는 서역인의 석상은 칼자루 비슷한 것을 쥐고 있는데, 칼자루가 아니라, 페르시아 지역이 원조인 폴로, 즉 국내에서는 격구로 불리는 경기의 스틱이라는 분석이 다소 우세해 보인다. 당시 페르시아에서 전래된 격구는 서라벌 대세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칼을 차고 내 무덤을 지켜달라’는 것 만큼이나 ‘스틱을 잡고 내 혼령과 놀아달라’는 망자의 주문도 일리 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망하던 7세기 중엽 마지막 왕자가 당나라로 피신했다가 신라로 건너와 신라공주와 결혼하고, 결혼동맹을 맺은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이 676년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는 ‘쿠쉬나메’ 이야기도 실감나는 듯 하다.

▶최치원도 페르시아 출신 처용을 잘 알았다

지금은 경주 박물관에 보관돼 있지만 황성공원 인근 용강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인물토용 28점은 하나같이 개구쟁이 스머프 모자를 닮은 호모(胡帽), 즉 앞으로 약간 휜 뾰족한 복두(幞頭)를 쓰고 있다. 한때 신라와 당나라엔 이 ‘호(胡)’라는 접두어를 붙이는게 유행이었다. 선진,첨단이라는 뜻이다. 궁중음악은 호곡, 귀족의 식단은 호식, 유행에 앞서나가는 귀부인의 패션은 호복, 절세미녀는 호희라고 부르는 식이다. 요즘으로 치면 영어를 차용해 ‘히트상품’, ‘히트곡’의 용법과 비슷하다. 호(胡)는 페르시아가 망하고 동진해서 정착한 지역 사마르칸트의 ‘소그드’를 뜻한다.

9세기말 헌강왕은 지금의 울산신항 근처에 방문했다가 운무 때문에 불편을 겪는다. 신화를 다소 현실적으로 개조하면, 헌강왕이 낙담할 때 일곱명의 서역 사관들이 탈춤을 추며 즐겁게 해주었는데, 이들 중 처용이 신라에 정착할 뜻을 밝히고는 임금을 따라 서라벌로 가 중간관리인 급간을 하면서 미모의 신라여인과 결혼한다. 9세기 신라 천재 학자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라는 문집 속에는 ‘속독(束毒)’이라는 시가 나타나는데, 서역의 탈춤을 묘사한다. 속독은 바로 소그드이고, 처용이 추었던 바로 그 춤이다.

▶페르시아 후예들로 알려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의 페르시아 내방 사절단 벽화. 이 벽화엔 손님으로 한국 대표 2명이 왔다고 표시돼 있다.

사마르칸트는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한 주(州)이다. 이곳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페르시아제국 시절 외국사절단 행렬도에 2명의 신라인도 포함돼 있다. 상호 왕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라벌의 서역 자취는 요즘 베니스에 가면 관광상품으로 시연되는 ‘대롱불기’식 로만 크리스탈을 비롯해 숱하게 발견된다. 로만 글라스는 로마-흑해-남러시아-사산조 페르시아를 거쳐 유입됐다고 학예사들은 전한다.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격파, 나-페 연합군의 당나라 격파

국립경주박물관에 길게 누운 길이 3m짜리 사자-공작 문석엔 나무 사이로 새 두 마리가 마주보는 ‘입수쌍조문(立樹雙鳥紋)’이 새겨져있는데, 이란 이스파한주 이맘광장의 모스크 중앙에 같은 무늬가 있다고 한다. 이 무늬는 이스파한의 재래시장에서 파는 카페트에도 나타난다. 9세기 중엽 흥덕왕은 당시 신라 표현으로 ‘구수’라 불리던 이 카페트를 사치품으로 간주해 사용을 금지시킨다.

이처럼 온 서라벌에 페르시아 흔적이 묻어나는 것은 두 나라간 교류가 장기적이고 전면적이어서 거의 ‘라-페 동맹’ 수준임을 느끼게 하고, ‘쿠쉬나메’의 신빙성이 더한다. 예술계 일각에서는 일본 여인과 미국 장교간 슬픈 사랑을 그린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 신라 공주와 페르시아 왕자간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쿠시나메에서 묘사한 신라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결혼식 풍경(방송화면 캡처)

숱한 ‘강남‘의 흔적들로 미뤄, 북천이 경주 남쪽에 있는데도 당시 서라벌에선 왜 그렇게 불렸는지 알 수 있다. 서라벌은 지구촌 문물이 거래되고, 국적을 초월해 친구관계를 맺는 대도시였다. 높이 70m가 넘는 당대 최고층 빌딩 황룡사는 지금으로 치면 송도국제도시 동북아트레이드타워에 견줄 수 있다.

서라벌은 서울이다. 청담동 이태원 명동의 밤은 화려하다. 여러 무리의 선남선녀가 강남의 황룡사에서 산책하다 마음이 맞으면 ‘지붕없는 박물관’ 남산으로 옮겨 데이트를 즐기고, 강북의 황성 인근 호원사에서 탑돌이를 하던 연인들은 ‘원나잇스탠드’도 감행하며….

▶황룡사는 송도 트레이드타워같은 랜드마크

기골이 장대하고 잘 생긴 페르시아 젊은 장교는 임금이나 귀족의 측근 참모가 되고, 바람둥이 페르시아 사관은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늦게 노닐던 중 귀부인을 유혹해 ‘네 개의 다리’를 만들었다가 부인의 남편에게 들키기도 했던….

인구 100만에 육박하던 7~9세기 경주는 유라시아 해상ㆍ육로 비단길의 종착점으로서, ▷중국의 장안(지금의 시안) ▷사라센제국의 수도 바그다드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그리스의 아테네와 함께, 문물과 풍요가 넘치는 세계 5대도시였다고 영남사학자들은 전한다.

기와집이 빼곡이 들어차, 남산에서 데이트를 즐기다 비가 오더라도 산 아래 첫 집의 처마밑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몇 ㎞를 걸어도 비를 맞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경주 서쪽의 선도산- 문희가 보희에게 판 꿈에서 소변을 보았던 산. 북천 이남 지역은 논이 많을 뿐, 7~9세기 기와집으로 빼곡하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금 문화재 보호구역 경주엔 신ㆍ증축이 엄격히 제한돼 있다. 그래서 서기 814년의 서라벌은 2014년에 응답하기 어렵다. 시민들 사이엔 “못살아도 자랑스럽다”는 의견과 “이젠 좀 먹고 살게 해달라” 요구가 교차한다. 옛 건물을 생활공간으로 쓰는 프랑스 파리 정도는 아니더라도, 7~9세기 세계도시 답게, 황룡사 복원과 함께 기와집 수만채가 북촌 이남지역 논밭에 들어서는 식의 ‘개발’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주는 올 때 마다 새롭다. 학생들의 개학 개강을 앞두고 테마를 갖고 경주를 또 다녀오는 것은 ‘9세기 뉴욕’ 서라벌에 대한 상상력을 살지운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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