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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은 아름답다지만 내겐 ‘상처’같았다
자전적소설 ‘꽃들은…’ 펴낸 서영은
김동리 작가와 남다른 인연 그려
3인칭시점 감정 아낀 담담한 문장
“사실과 거리 두는데 40여년 세월
보편적인 사랑으로 읽혀졌으면…”


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영은 지음
해냄
소설은 허구를 매개로 삶의 실체를 들춘다. 소설 속 자아를 작가와 동일시해 작가에 대한 나름의 환상에 빠지는 독자들도 적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 실화, 그것도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은 꽤 자극적이다. 사전적 의미와 관계없이 실화라는 단어는 관용적인 표현상 자극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자서전과는 달리 자전적 소설은 허구적인 서사로 실제를 풀어내기 때문에 독자에게 상당한 상상력과 오해의 여지를 남긴다. 작가의 생이 남달랐다면 더욱 그러하다.

세간이 기억하는 서영은(71) 작가는 한국 문단의 거목 고(故) 김동리(1913∼1995) 작가의 세 번째 부인이다. 서 작가는 24살 무렵 김동리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그에겐 두 번째 부인 손소희(1917~1987) 작가가 있었다. 그러나 손소희는 둘의 관계를 묵인했고, 기묘한 삼각관계는 20년 이상 계속됐다. 서 작가는 손소희의 사후 김동리와 결혼했지만, 김동리는 불과 3년 후인 1990년 중풍으로 쓰러졌고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서 작가의 남다른 삶을 향한 세간의 시선이 결코 우호적이지만은 않았으리란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서 작가가 ‘그녀의 여자’ 이후 14년 만의 신작인 장편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작가와 김동리의 만남부터 결혼 생활까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지난 4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작가는 “그동안 구도(求道)의 한 방편으로 문학을 해왔는데, 이 작품은 그 과정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라며 “구도의 과정이 김동리 선생과의 인연에 모두 담겨 있는데 이를 놓아두고 계속 다른 소재로 글을 써온 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집필의도를 밝혔다.

작가가 간담회 내내 강조한 것은 객관성이었다. 자전적 소설을 집필하면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하는 의문 어린 시선을 미리 차단하려는 듯 서 작가는 “소재는 자전적이지만 나와 김동리에 대해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가로서 삶의 진실과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고 못 박았다.

이 작품은 마지막 목차에서 잠시 1인칭 시점으로 전환되는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유지한다. 소설 속 화자는 작가의 분신 격이자 전직 문예지 기자 출신 작가인 ‘강호순’이다. 김동리는 ‘박 선생’, 손소희는 ‘방 선생’으로 그려지지만 전개되는 이야기는 작가의 표현대로 ‘사실’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장편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를 출간한 서영은 작가가 지난 4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제공=해냄]

‘강호순’은 오랜 세월 기다림으로 설레는 ‘연인’이었던 ‘박 선생’이 결혼 후 깐깐한 ‘노인’이 된 현실이 당혹스럽다. 작가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문장으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격정적인 표현이 어울릴 법한 수많은 자리에서도 작가는 지독하게 말을 아끼고 있다. 소설이 1인칭 시점으로 돌아서는 말미에서 ‘강호순’이 ‘박 선생’의 아들로부터 “너는 우리 아버지 요강에 지나지 않아. 이제 필요 없어”라는 입에 담기 힘든 모욕을 들을 때조차도 이 같은 거리감은 팽팽하다. 이 작품이 인간과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읽히길 원했다는 작가의 변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순간이다.

작가는 “사실을 놓고 획득한 이 거리감이야말로 46년간 소설가로서 살아오며 도달한 하나의 경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며 “만약 작품을 통해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면 내 소설 쓰기의 실패라고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김동리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소설의 제목은 2000년대 초반 어느 카페 안에서 들은 노래 가사의 한 귀퉁이다.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작품이 완성된 이유에 대해 작가는 사실과 거리를 두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고 고백했다. 이 같은 작가의 말을 염두에 두고 담담한 문장들을 더듬다 보면, 덜어냈거나 혹은 참아냈을지도 모를 문장들이 행간 곳곳에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작가는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대로 끝내지 않고, 앞으로 두세 작품에 걸쳐 더 이어갈 뜻을 전했다. 작가는 “꽃은 아름다움의 절정이라지만 내겐 식물의 상처처럼 보였다”며 “꽃이 져서 열매가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과 그 열매가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 더 필요하다”고 전했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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