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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종룡 회장의 ‘農協’金融之大本
NH농협금융지주 회장 취임 반년만에 우리투자증권 인수…32년 공직생활 통해 얻은 진정성의 ‘겸손한 카리스마’

거짓이 없이 참됨을 뜻하는 ‘진국’같은, 누구나 만나고 싶고 마주하고 싶은 사람.

늘 자신을 한껏 낮춘다. 누구나 고개가 숙여지고 끄떡여진다. 저런 겸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주어진 많은 실타래들이 그의 손에서는 술술 풀린다.

카리스마가 아닌 범인의 진정성이, 개인이 아닌 조직의 단결력이, 독단이 아닌 협동과 부드러운 리더십이 통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부모님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인생철학이자 32년 공직생활에서 수없이 극복한 경제ㆍ금융 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겸손은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결단의 순간에 앞서 다시 한 번 자신과 주위를 되돌아보는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 회장.

민간 최고경영자(CEO)로의 변신이 채 자리 잡기도 전에 최근 우리투자증권을 농협금융의 품에 안는 성과를 거뒀다.

상대방을 꿰뚫는 혜안과 미래를 내다보는 전략, 그리고 그 중심에는 겸손함과 진정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직자에서 금융인, 그것도 상업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농협맨’으로 변신한 임 회장. 그에게 1등 증권사를 손에 넣은 올해는 농협금융 ‘퀀텀점프(대도약)’의 해가 될 것이다.

농협에 몸담은 사람의 첫 번째 자세로 “농협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적응하겠다는, 그리고 배우겠다는 생각만 했다”고 말한다. 옳고 그르냐의 이해보다 농협에 맞춰야겠다고 자신을 낮춘 그의 ‘겸손한 카리스마’ 속으로 들어가 봤다.

지난 8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NH농협금융지주 본사에서 만난 임 회장은 이렇게 긴 인터뷰는 처음이라면서도 지난 공직생활과 우리투자증권 인수의 뒷얘기, 농협금융지주에서 펼칠 경영철학과 가족사에 이르기까지 담담하게 털어놨다.

약간 굽은 어깨와 펑퍼짐한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양손, 가끔씩 씩 웃는 모습에 과하지 않은 제스처, 먼저 배려하려는 모습 등이 상대를 빠져들게 하는 그만의 의도치 않은 비법이 아닐까?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다. 우리투자증권 인수는 임종룡 회장과 NH농협금융지주에 있어 완성이 아닌 시작이다. 뚜렷한 청사진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오랜 공직생활에서 우러나온 경영철학으로 똘똘 뭉친 임 회장. 그가 디딜 다음 행보에 금융권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피(彼)

임 회장은 우리투자증권 인수의 성공 요인으로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을 꼽았다. 여기에서 피(彼)는 입찰에 참여한 경쟁 회사가 아닌 정부였다. 우리금융을 파는 쪽이다.

옛 재무부 선배인 변양호 보고펀드 대표에게 자문을 구했다. “ ‘파는 사람이 뭘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포인트’라는 답변은 농협금융이 인수전략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정부는 우리투자증권에 우리자산운용ㆍ우리아비바생명보험ㆍ우리금융저축은행 3개사를 묶은 ‘1+3 일괄 매각’을 민영화 원칙으로 밝힌 터였다.

“패키지 매각과 함께 조속한 민영화가 정부의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투자증권뿐 아니라 나머지도 사겠다는 의사 표시를 분명히 했죠.”

그러면서 합리적인 가격을 고민했다. 이길 수 있는 가격을 찾는 게 아니었다. 임 회장은 “인수 총액은 농협이 감당할 정도를 쓰자였다. 부담이 되지 않는 가격 수준을 찾는 게 목표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개별사별로 가격을 제시하면서 매수 의사를 분명히 했다. 고른 베팅이 주효했던 것이다.

임 회장은 내부적으로 한목소리를 내는 데도 매진했다. 대주주인 농협중앙회와 농협금융 계열사, 현장에 있는 직원들에게 우리투자증권 인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노동조합에도 기꺼이 설명했다. 부족한 경쟁력을 보완하려면 경쟁을 잘하는 1등 금융회사를 데려오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이다. 앞으로 금융 시스템은 자본시장 중심으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본시장이 자본주의에 가장 맞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투자증권은 제격이었다.

최원병 농협중앙회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도 큰 힘이 됐다. 경기도에서 가장 영업하기 어렵다는 연포동(연천ㆍ포천ㆍ동두천) 지점을 찾아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농협금융의 비전을 심었다. 이런 노력으로 조직 내에서는 취지를 이해하고 마침내 공감대가 형성됐다. 현장의 목소리 청취는 취임 전 노조와 약속한 부분이기도 하다.

■융(融)과 3(三)

본입찰 참여 하루 전날(지난해 12월 15일 일요일)이다. 머리가 무겁다. 바람이라도 쐬야겠다 싶어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갔다. 한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도 했다. “잘될 수 있게 해 달라고…”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계기판을 봤다. 어떤 암시였을까. 모든 숫자가 3이었다. 지금까지 달린 거리 33333.3㎞, 기름 넣고 달린 거리 333.3㎞. 3자 열개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을 되돌렸다. 우리가 인수 회의를 몇 번 했던가. 33번이었다. 인수팀 명칭은 무엇인가. ‘300’이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전사가 페르시아 100만 군대와의 전투를 그린 영화 ‘300’에서 착안했다. 농협금융의 인수팀은 7명이지만 영화 속 300인의 정신을 가지라는 의미였다.

인수 프로젝트의 명칭은 삼두마차를 뜻하는 ‘트로이카’다. 임 회장은 트로이카의 의미에 대해 “은행ㆍ증권ㆍ보험의 삼두마차가 고르게 농협금융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인수팀에서 직접 지었다고 했다.

지주회사체제 이후로 금융권은 그룹 대 그룹의 경쟁으로 바뀌었다. 은행ㆍ증권ㆍ보험이 칸막이를 쳐놓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융합금융 시대가 됐다. 더욱이 농협금융은 중앙회의 거대한 우산 속에서 안주해온 게 사실이다.

농협 내 경쟁적 문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1등 금융회사를 인수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봤다.

“은행은 그런대로 쫓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험은 업계 상위권이죠. 증권만 보완한다면 금융그룹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투자증권 인수에는 이처럼 뜻하지 않게 숫자 3과 인연이 많았다. 임 회장은 본입찰 당일(지난해 12월 16일), 꺼내든 만년필로 입찰가격의 중요한 부분에 3을 적어 넣었다.

그는 인수 후 전략을 이미 인수 전에 구상했다. 오는 3월 인수작업이 끝나면 바로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럴 것이 농협금융에게 대형 인수합병(M&A)은 처음이다. 인수 후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시간은 농협금융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농협금융은 농촌과 농민의 수익센터가 될 것입니다.” 임 회장의 목표다.

인수에 있어 치밀한 준비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父)

전남 보성에서 네 살 때 상경했다. 축구와 야구를 좋아하고 공부는 뒷전인 평범한 동네 아이였다. 부모님도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 회장은 “부모님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신 게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오죽하면 시험 치는 날도 몰랐을까. “어느 날 교실에 들어가니 제 책상이 짝꿍 책상과 떨어져 있었어요. 책상 배치를 보고 시험날이란 걸 알았죠.”

그는 회계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부’를 했다. “ ‘회계사도 전문가이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직업이지만 회계사보다는 공직에 몸담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공직이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보람된 자리라는 가르침이었다. 공직의 가치를 인정하고 강조한 아버지의 바람을 임 회장은 따랐다. 3남2녀 중 장남인 임 회장의 두 동생도 현재 공적인 일을 하고 있다.

임 회장은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한다. 자상하고 진솔한 아버지. “ (아버지가) 늦게 퇴근하시면 어머니가 밥상을 따로 내오셨는데, 반찬이 달랐어요. 5남매가 가만히 있으면 아버지는 뜨는둥 마는둥 밥상을 물리시고 맛있는 반찬은 우리 남매 차지가 되곤 했죠.”

“좌우명이 뭐냐고요? 저는 진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주신 생활철학은 진정성이고, 진솔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나 다 설득할 수 있고 누구나 다 적응할 수 있습니다.”

다복한 가정에서 자란 임 회장의 가족사랑은 극진하다. 방송사에 근무하고 있는 부인 최수형 씨와의 사이에 1녀를 둔 그는 요즘 딸바보가 됐다. “우리 딸은 나랑 똑같이 생겼어요. 그래서 부녀를 보고 구공탄이라고 합니다.”

딸(27)은 아버지와 같은 연세대 경제학부를 나와 현재 IT 관련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 (해외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하던 딸이 취직해서 사회 경험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멀리 보내지 않아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가슴이 아팠죠.”

그런 아버지였지만 2009년 11월 나랏일을 돌보다 부친의 임종을 놓쳤다. 당시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이던 임 회장은 불철주야 돌아가던 업무에 미처 병상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전형인 셈이다. 당시 임 회장은 잇몸이 흔들려 치아를 세 개나 뽑았고 나중에서야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건(健)

축구는 그에게 많은 걸 줬다. 재무부 시절 동료애와 함께 조직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문화를 배웠다. 지향하는 가치를 같이 만들어 갈 수 있는 매개이기에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무릎 연골이 파손되도 축구장에 있었다.

한때 체중이 많이 나가 ‘나는 돈까스’라는 별명까지 붙었지만 무릎이 상한 뒤로 축구는 더 이상 엄두를 못낸다.

그러한 정신은 금융 관료 생활 전반을 관통했다. 32년 공직생활 중 절반 정도 금융업무를 했다. 그것도 구조조정 업무가 주였다.

1980년대 후반 산업합리화 당시 해운산업 합리화와 국제그룹 해체 업무 등을 주도했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기업구조조정개혁반장을 맡으면서 은행 합병 등을 도맡았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청와대에 있으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탈출을 도왔다.

그러면서 절감한 부분이 있다. 바로 건전성이다.

“건전한 금융회사는 위기가 와도 성장합니다. 건전하지 못한 금융회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죠.” 임 회장은 외환위기 때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5개 은행 구조조정 반대 집회에 간 적이 있다고 한다. “직장을 잃어야 하는 절박감과 고통, 이런 것들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금융회사 최고의 덕목은 바로 건전성임을 체감했습니다.”

농협금융이 지향해야 할 첫 번째 가치도 ‘건전성’을 꼽았다. 리더의 첫 번째 역할로는 진정성있게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임 회장은 닮고 싶은 선배로도 자주 뽑혔다. 돌아오는 답변은 “사람이 물러터져서 그런 게 아닌가”였다. 그는 “후배들이 저를 평가해 준 바가 굳이 있다면, 부족하지만 갖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들을 전수하는 일을 첫 번째 임무라고 생각한 것 뿐”이라고만 했다.

부하직원을 대하는 그의 철학도 남달랐다. ‘내가 떠나더라도 후배들이 이 조직을 위해 어떤 기여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공(公)

“거대한 조직에 다양한 사업, 다소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을 겪지만 협동조합 정신 아래에서 결국 앞으로 나가는 결과물을 창출하고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임 회장은 농협에 대해 상업성과 공공성이 혼재한 곳이라고 말한다. 민간 금융회사와 공공조직의 중간 지대에 있다는 의미다. 회장직을 제의받았을 때 이런 공공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김황식 전 총리와 상의했다고 한다. “총리께서 ‘국가에 대한 기여가 꼭 공직만이 아니라, 뚜렷한 공적인 목표를 가진 기관에서 일하는 것도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고 충고하셨습니다.”

그는 “농협금융은 다른 금융지주와 다르다. 누구(농촌과 농민)를 위해 이 조직이 존재하는지 명확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공직 경험이 농협에서 유용하게 작용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농협행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습 사무관 시절 고향인 보성 근무를 자청했다. 당시 할머니께서 “농협지부장 해 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농협에서 제의가 왔을 때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제가 농협맨이 된 것이 할머니의 계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얼핏 했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를 묻는 질문에 선배들에게 누가 될까봐 한사코 거명하지 않았다. 거듭된 요청에 우리투자증권 인수전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선배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임 회장은 “생활하면서 가장 큰 복이 있다면 상사복”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KB금융 임 회장과는 1987년 이재국 산업금융과에서 선배 사무관으로 첫 인연을 맺었고, 상당기간 공직생활을 같이했다. 밤샘 근무 후 힘들 때면 두 사람이 과천에서 자주 볼링을 쳤다고 한다.

또 “최원병 회장은 농협이 지향하는 바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분이며 따라서 농협을 가장 아끼는 분과 생각을 달리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다. ‘겸손한 리더십’이라고 불리는 데 대해 그는 “가진 게 없으니까 겸손해야죠”라고 말할 뿐이다.

국가에 충성하고, 조직에 충성하며 상사에 충성하는 것을 공직자의 덕목으로 삼아왔다는 임 회장. 그와 농협금융지주의 향후 달라질 모습이 사뭇 궁금해진다.

대담=김형곤 금융투자부장/kimhg@heraldcorp.com

정리=조동석 기자/dscho@heraldcorp.com

임종룡 회장이 걸어온 길…

▷1959년 전남 보성 출생. 영동고 졸업
▷1980년 제24회 행정고시 합격 
▷1982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2001년 재정경제부 증권제도과장 
▷2002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ㆍ종합정책과장 
▷2004년 주 영국대사관 재경관 
▷2007년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
▷2008년 기획재정부 기획조정실장 
▷2009년 대통령실 경제수석실 경제비서관ㆍ경제금융비서관
▷2010년 기획재정부 제1차관 
▷2011년 국무총리실장 
▷현NH농협금융지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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