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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로명 시대’ 열리자…부동산이 가장 먼저 달린다
주소 표기방식 변경 미묘한 파장
부동산·상권에 미칠 영향 촉각

기업 명함주소 등 변경에 ‘생돈’
해외고객 “사옥이전했나” 잇단 질문 곤혹
특허관련 기업들도 불이익 걱정




도로명주소는 단순히 이름이 바뀌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랜 기간 이어온 생활권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동(洞) 단위의 생활문화권이 로(路) 중심으로 변모한다. 대치동 프리미엄 대신 삼성로 프리미엄이 조명받게 될 시대다. 

▶“빚 내서 대치동으로 들어갔는데…”, 도로명주소 후폭풍=국내 대형 물류기업에 다니는 이모(42) 과장은 2년 전 강북 시대를 접고 대출을 받아 대치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대치동 경계선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가 계속 눈에 밟혔다고 한다. 이 씨는 “교육 수준을 무시할 수 없었다. 대치동 끝자락이지만 무리하더라도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도로명주소가 시행된 이후 이 씨의 집주소엔 대치동이 사라졌다. 그는 “도로명주소가 교육환경이나 부동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이 씨만의 사례는 아니다. 도로명주소로 오는 변화는 중장기적인 과제가 더 많다. 상권, 부동산을 비롯해 생활 전반에 걸쳐 기존 ‘동 중심’의 문화를 대신할 ‘길 중심’의 새로운 구역이 떠오른다. 함영진 부동산114 리서치센터장은 “도로명주소가 시행된 이후 주택보단 상권에서 더 빠르게 변화가 생길 것”이라며 “바둑판처럼 형성된 강남지역에는 도로명주소를 확산시키기에 더 조건이 좋다. 상권마다 해당 도로명이 빠르게 전파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팀전문위원은 “선(線)형으로 주소가 바뀌면서 동일 생활권에서 동 중심이 사라지고, 상권도 길 이름이 중요하게 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도로명주소를 전격 도입한 안전행정부도 이 같은 변화를 예상하고 있다. 안행부 주소정책과 관계자는 “도로명주소를 처음 추진할 때에도 부동산값을 둘러싼 반응이 뜨거웠다. 괄호를 사용해 동이름을 추가 표시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그 대책의 일환”이라며 “다만 장기적으로 부동산값이 변화할 수 있다는 건 정부 차원에서 개입할 수 없는 시장 논리”라고 밝혔다.

도로명주소로 바뀌더라도 학군이나 경찰ㆍ소방서 관할 지역 등은 기존 그대로 유지된다. 즉, 당장의 큰 혼란이 빚어지지 않으리란 게 안행부의 판단이다. 다만 도로명주소 시행과 별개로 이들 행정구역을 새롭게 정리, 개편하는 작업을 현재 진행 중이다. 도로명주소 시행으로 일정 기간 혼란이 불가피한 만큼, 이들 행정구역 개편 작업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2014년부터 도로명주소가 전면 도입됐다. 기존 동 이름의 주소 대신 한남대로 28길 등 도로명이 주소에 쓰이게 된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기업에 부는 변화는 ‘찻잔 속 태풍’, 왜?=기업마다 직원 명함에 박힌 주소를 변경하느라 ‘생돈’을 쓰고, “회사 주소가 왜 바뀌었냐”는 외국 거래처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 도로명주소 전면 시행이 예고되면서 우려됐던 기업들의 노고다.

그러나 기업들이 겪는 변화나 지불하는 비용은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위기경영의 고삐를 죄고 있는 기업들이 ‘쓸데없는 돈은 들이지 않는다’는 기조를 확실하게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주소 자체가 두드러지게 변하지 않는 데다, 비용 절감 차원에서 무리하게 명함이나 내부용 문서강의 인쇄를 일괄 교체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어차피 도로명주소 완전 정착에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차근차근 대처하겠다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임직원 명함에 쓰이는 주소도 향후 교체 시기가 됐을 때 도로명주소로 바꾸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일각에서는 주소가 바뀌는 것 때문에 특허권 분쟁을 겪고 있거나, 외국과의 거래를 하고 있는 기업에 불이익이 갈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기업 주소명이 바뀌었다는 것을 핑계로 기업의 정체성을 따지고 들거나, 거래대금 지급 기일을 차일피일 늦추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이 같은 기업들의 입장을 고려해 사기업에는 도로명주소 사용을 강제하지 않고 있다. 특허 관련해서 기업이 주소 변경으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안행부가 ‘주소 동일성 증명’도 해주고 있다. 이는 기존 주소와 새로운 도로명주소가 같은 것이라고 정부가 입증해주는 것으로, 신청 비용은 무료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해외 거래처 등에 바뀐 영문주소를 통보하는 과정에서 ‘사옥을 이전했느냐’는 문의가 일부 있었다”며 “국가적 정책임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전했다.


▶애꿎은 도로명 개편? 외국은 어떻게=해가 바뀌자 전면 도입된 도로명주소 방식을 두고 불편하다는 지적이나 동 단위의 고유 지명이 사라진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도로명주소 사용의 취지는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점에서도 따져볼 수 있다. 지번 방식의 위치 표기가 사용된 것은 일본이 식민통치와 조세수탈을 위해 1910년 토지조사사업을 했던 것이 그 시작이기 때문이다.

도로명주소 사용을 통해 잊혔던 옛 지명을 되살리거나 기존 지명을 유지한 곳들도 많다. 강릉의 ‘내맬길’ ‘매맥이길’ ‘닭목이길’ 등은 마을이름을 그대로 도로명에 활용했고, ‘안땔길’ 등 옛 지명을 살린 곳도 있다.

외국의 경우도 도로명주소가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 회원국 중 26개국이 도로명주소를 사용하고 있고, 이 외에도 중국 대만 몽골 태국 베트남 미얀마 필리핀 가나 오만 등 40개국이 도로명주소를 채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로명주소는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기본적인 원칙은 도로 폭에 따라 ‘대로’와 ‘로’ ‘길’ 등이 구분된다. ‘로’ 등의 도로명에 숫자가 붙는 경우는 건물 사이 간격과 관련이 있다. 건물번호가 1이면 대략 10m 간격임을 뜻한다. 예를 들어 ‘토함로 5’는 토함로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왼쪽으로 50m가량 떨어진 곳이란 뜻이다. ‘토함로 5-2’는 토함로 시작부터 50m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는 두 번째 집이란 의미다.


특별취재팀=홍승완ㆍ도현정ㆍ 김상수 기자/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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