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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리뷰 - 더 퍼지> 일년에 한번 허락된 ‘무법 하루’…범죄율 1% 천국의 어두운 이면
2022년의 미국은 범죄와 빈곤, 실업 등 현대사회의 고질병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새로운 나라다. 실업률과 범죄율이 1% 이하의 사상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새로운 미국의 건국자들은 1년의 단 하루, ‘퍼지데이(purge day)’를 지정함으로써 ‘천국의 약속’을 가능하게 했다. ‘퍼지데이’란 무엇일까. 12시간 동안 절도ㆍ강도ㆍ강간은 물론이고 살인까지 허용되는 ‘무법의 하루’다. 전날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경찰서와 소방서ㆍ병원 등 주요 기관의 업무는 정지되고, 모든 시민은 어떠한 폭력이나 흉기ㆍ총기에 의한 살상도 허락된다. ‘퍼지데이’야말로 새로운 미국을 가능하게 한 가장 은혜로운 축복이라고 칭송된다. 이 매력적인 아이디어를 담은 영화가 ‘더 퍼지’(감독 제임스 드모나코)다. ‘퍼지’는 ‘제거ㆍ숙청(하다)’ 등의 뜻을 가진 영어단어다.

영화 속의 ‘퍼지데이’는 말하자면,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ㆍ폭력의 욕구를 주어진 시간에 다 발산하게 하는 대신, 1년의 일상은 평화와 안전을 추구한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퍼지데이’는 폭력과 범죄에 대한 일종의 ‘백신’인 셈이다. 


주인공은 ‘퍼지데이’의 강력한 지지자로 주택보안시스템을 상품으로 파는 영업사원 제임스(에단 호크 분)다. 2022년의 ‘퍼지데이’ 시작을 몇 시간 앞두고 제임스는 회사로부터 새로운 보안시스템 판매 1위를 달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귀가한다. ‘퍼지데이’로 매출이 승승장구하는 회사 덕에 남부러울 것 없이 호화주택에 사는 그 역시 완벽한 보안시스템을 가동하며 TV로 생중계되는 ‘퍼지데이’의 지옥도를 느긋하게 감상할 생각 뿐이다. 저녁식사 시간 남자친구 문제로 딸 조이(애드레이드 케인 분)와 언쟁을 벌이고, 사춘기에 접어든 어린 아들 찰리(맥스 버트홀더 분)와도 잠깐의 신경전이 있었지만 제임스는 여느 ‘퍼지데이’와 마찬가지로 철통처럼 외부 세계와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딸 조이의 남자친구가 집 내부에 잠입해 교제를 반대하던 제임스와 총격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또 폭도에 쫓겨 목숨을 위협당하던 한 노숙자 흑인남자가 집 바깥에서 구조를 요청하고, 이를 CCTV로 보던 아들 찰리가 보안을 일시 해제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인다. 흑인 남자를 뒤쫓던 살인마 같은 폭도는 자신들의 사냥감을 내놓으라며 집 앞까지 들이닥친다. 딸 남자친구와의 총격전과 흑인 남자와의 인질극, 폭도의 위협 속에서 제임스는 가족을 지켜야 하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한다.
집 밖으로 내놓으면 죽을 것이 뻔한 무고한 흑인 남자를 두고 가족은 도덕적인 갈등에 처한다. 아버지인 제임스는 무조건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인과 자식은 “그럴 수 없다”고 버틴다. 그것은 소수의 약자가 희생당하는, 아무 이유없는 살육의 축제를 벌임으로써 대다수 시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퍼지데이’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도덕적인 물음을 품고 집 안으로 침임해 들어온 폭도와 가족이 벌이는 쫓고 쫓기는 게임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거창하고 기발한 아이디어와 졸렬하고 식상한 ‘하우스 스릴러(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추격 스릴러)’가 어중간히 결합한 양상의 영화가 됐다. 설정은 폭력을 먹이삼아 지탱되는 현대사회의 모순을 꼬집고 있지만, 드라마의 전개는 문명 비판적인 주제의식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앙상한 느낌을 준다. 설득력 없는 인물 심리의 변화와 구태의연한 극적 전환이 특히 큰 흠이다. 7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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