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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 KYJ 투어 챔피언십]김태훈 “대세남이라고요? 진짜는 이제부터죠.”
180cm의 훤칠한 키에 곱슬거리는 갈색머리, 시원한 마스크의 그가 골프장에 나타나자 아마추어 여자 골퍼 몇 명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골프공과 사인펜을 건네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연방 싱글벙글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골프장 밖에서도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졌다”며 싫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올해 한국남자프로골프(KPGA)의 ‘대세남’ 김태훈(28). 지난 8월 보성CC 클래식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그는 어느덧 상금랭킹 5위(2억5220만원) 대상 포인트 3위(3085점)에 이름을 올렸다. 2007년 코리안투어 데뷔 후 6년간 톱10은 커녕 예선통과자 명단에서조차 이름 석자를 찾기 어려웠던 그다. 사람들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모두 떠난 KPGA에 새로운 보물이 나타났다고 흥분했다. 올시즌 최종전인 헤럴드 KYJ 투어 챔피언십에 출전한 김태훈을 대회가 열리는 롯데 스카이힐제주CC에서 만났다. 김태훈은 “올초 톱10에 한번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며 “내친 김에 이번 헤럴드 KYJ 투어챔피언십에서 올해 마지막 우승컵을 들어올려 대상도 받아보고 싶다”고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입스라는 단어도 몰랐던 내게…”=입스(Yips). 프로골퍼들이라면 떠올리기도 싫은 단어다. 샷을 할 때 호흡이 빨라지고 손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는 현상. 한번 걸리면 온갖 묘약을 다 써봐도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어 골퍼들에겐 ‘불치병’ ‘마음의 병’으로 통한다. 김태훈은 무려 8년을 드라이버 입스에 시달렸다. “저는 솔직히 입스라는 단어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저더러 드라이버 입스라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는 데 2년 걸렸어요.” 아마추어 땐 잘 나가는 국가대표였다. 우승도 밥먹듯이 했고 연습을 안해도 드라이버 비거리가 지금(300야드)보다 더 멀리, 똑바로 날아갔다. 웬만한 프로 1, 2위를 붙여놔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더 오를 곳이 없어 우쭐했다. 그런데 대학 첫 대회 3라운드서 아웃 오브 바운즈(OB) 10개가 나면서 89타를 기록했다. 충격을 받았지만 ‘어쩌다 그런 거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그때부터 아무리 연습을 해도 공이 똑바로 날아가지 않았다. 연습을 할수록 공은 더 휘었다. “다른 사람들은 입스에 걸리면 OB 밖에 안보인다는데, 저는 백스윙을 하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몸이 굳었어요. 그러면 늘 오른쪽으로 날아갔죠.” 멘탈트레이닝을 해도, 스윙코치를 바꿔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간신히 1부 투어 시드를 따고 2007년 데뷔했지만 11개 대회에 출전해 모두 예선탈락. 솔모로오픈 때는 11홀을 도는데 12개의 OB가 나는 바람에 같이 치는 선수에게 너무 미안해 기권하고 나왔다. 그대로 골프 채를 놓고 싶었다. 

올해 상금왕과 대상, 최저타 수상자 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될 헤럴드 KYJ 투어 챔피언십이 29일 제주 서귀포시 롯데스카이힐 제주CC에서 화려하게 막을 올린 가운데 김태훈이 힘차게 티샷을 날리고 있다.
[제주=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매킬로이, 첫 만남은 아쉬웠지만”=매년 이듬해 시드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2011년 말엔 시드전에서도 떨어져 2012년 시드를 따지 못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처음부터 시작해보자고 했다. 그동안 안좋았던 척추를 교정하고 태어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웨이트 훈련을 했다. 캐디백을 메는 아버지 김형돈(53) 씨와 스윙분석을 하며 하나씩 고쳐나갔다. 가끔씩은 집 근처 골프장에서 친한 동생들과 라운드도 했다. 그런데 페어웨이가 넓은 골프장에서 OB 걱정하지 않고 신나게 휘두르다보니 공이 홀을 벗어나지 않기 시작했다. 8년간 발목을 잡았던 지긋지긋한 입스에서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티박스에 서면 다른 누구보다 강심장이라 자부해요. 그 긴 터널을 지나왔잖아요. 아쉬운 게 있다면, 3년만 더 빨랐더라면 하는 거죠. 좀 오래 걸렸잖아요.

지난 한국오픈에서 한때 세계랭킹 1위에 올랐던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와 동반플레이한 것도 꿈만 같다. “어떻게 꿈을 꿀 수 있었겠어요. 상상도 못한 일이죠. 그런데 올해 성적이 조금씩 나니까 ‘혹시?’ 하는 기대는 생겼어요. 아무래도 둘다 장타자이니까 갤러리들에게 보여주는 맛도 있잖아요. 그런데 한국오픈 때 제가 좀 욕심을 내서 잘 못친 게 많이 아쉬워요. 드라이버 거리는 둘쨋날 비슷하게 가긴 했는데…. 제가 영어가 안돼서 많은 이야기는 못나눴지만 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제 꽃피울 일만 남았다”=샷도, 웃는 얼굴도, 말하는 모습까지 시원시원하다. 원래 성격은 정반대였단다. “매번 예선탈락하니까 경기장에서 친했던 선수들을 봐도 피해다녔어요. 창피했거든요. 라커룸에 가면 선수들 만나니까 어떤 날은 씻지도 않고 도망치듯이 경기장을 빠져나왔어요. 좀 내성적이었던 성격인데 더 말이 없어진 거죠. 그런데 골프 채를 잠시 놓았을 때 성격이 확 바뀌었어요. 올해는 성적이 좋으니까 더 밝아졌고요. 기술 면에선 스무살 때보다 좋아졌다고 말하지 못하겠지만 정신적으로 상당히 성장한 것같아요.”

김태훈은 11, 12월 열리는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큐스쿨 3,4차전을 통과하면 내년 한국과 일본 투어를 병행할 예정이다. 더 먼 꿈은 당연히 PGA 투어 진출이다.

김태훈이 오랜 시간 부진을 겪고 있을 때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 강타자였던 김준환 원광대 감독의 동생이자 축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 김형곤 씨는 이런 말을 했다. “봄에 피는 꽃이 있고, 여름 가을에 피는 꽃이 따로 있다. 네 꽃은 아직 필 때가 아닌 거다.”

김태훈에게 물었다. 얼마만큼 꽃을 피웠는지. 김태훈은 “지금은 겨우 봉오리죠. 아직 핀 거라고 생각 안해요. 앞으로 꽃피울 일만 남았어요. 더 열심히 해야죠.” 김태훈의 꽃은, 조금 늦게 핀 만큼 더 오랫동안 짙은 향기를 내뿜을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주=조범자 기자/anju101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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