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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화성 연쇄살인사건’ 이 2013년에 일어났다면 범인은 잡혔을까?
한국 CSI 65년…발전하는 과학수사
당시 DNA감정 日에 의존 ‘굴욕’
1991년 DNA수사시스템 도입
정교해진 수사로 세계 최고 수준

혈흔분석 · 걸음걸이 분석까지
한국 과학수사 날로 진화


“FBI가 왜 과학수사 하는지 알아? 미국은 엄청 넓거든. 하지만 대한민국은 뛰어야 벼룩이야. 걸어다니다보면 밟히게 돼있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형사 박두만은‘ 과학수사’를 한답시고 서울에서 파견된 후배 형사를 향해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직감’이 최고의 수사기법이라 자부하던 그는 피해자 사체가 발견된 논두렁을‘ 질겅질겅’ 밟고 다닌다. 현장에 남아있을 수도 있던 범인의 흔적도 동시에 사라진다. 이 장면은 당시만 해도 열악해던 경찰 수사의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 그 서슬퍼런 서막을 열었던 1986년 당시 경찰의 수사는 주먹구구식이었다. ‘과학수사’는 낯선 단어였고 당연히 과학수사 전문요원은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은 당연한 절차인 유전자(DNA) 감정도 해외 기관에 맡겨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다르다. 올해로 68세를 맞이한 우리 경찰은 감에 의존하는 ‘박두만 식 수사’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피 한방울, 발자국 하나, 심지어 걸음걸이만으로 얼굴 없는 범인의 신원을 밝혀낸다. 그렇게 첨단 과학의 옷을 입은 한국 경찰은 더욱 강력하고 정교한 수사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경찰 업무의 꽃이자 본질인 수사는 지난 60여년 동안 어떤 진화를 해왔을까.

▶한국 과학수사의 65년 역사…2000년대 ‘한국 과학수사의 격변기’=우리나라 과학 수사의 시작은 예상보다 빠르다.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찰청에 따르면 1948년 11월 대통령령 18호에 의거해 치안국 감시과가 처음 생겼다. 이곳이 최초의 ‘한국형 CSI’다. 경찰 지문감식 및 법의학적 감정을 담당했다. 법의학계, 이화학계, 지문계 등 3개 분야로 나뉘었다.

1955년 3월께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신설하며 기존의 감식과가 수사 지도과 소속 감식계로 확대된다. 1963년 각 시ㆍ도 경찰국에도 감식계가 신설됐으며 1981~1986년께 치안본부 감식과로 승격 개편된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속이 치안본부에서 경찰청 형사국과 수사국으로 바뀌었고 1999년 12월 비로소 ‘과학수사과’라는 이름을 달며 본격적인 과학수사 시스템으로 전환하게 된다.

사실 한국의 과학수사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20년도 안되는 짧은 세월이지만 이 기간에 한국의 과학 수사는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 과학수사의 격변기’라고 불릴 만큼 양적ㆍ질적 성장을 이뤘다. 실제로 과학수사를 전담하는 전문요원이 하나도 없던 초기와는 달리 2013년 현재는 1250여명의 과학수사요원들이 활동 중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국민참여재판 등 사법환경의 변화에 따라 ‘증거 중심주의’에 발 맞추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또 2000년대 초반부터 각종 매체를 통해 과학수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국내 과학수사의 질적 성장을 가져온 배경 중 하나”라고 말했다.

▶다양해진 ‘지문’-정교해진 ‘DNA’=가장 전통적인 과학 수사 기법은 지문 증거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과학 수사도 1910년 조선총독부에서 수행했던 지문 자료에 관한 감식 업무로 알려져 있다.

지문 감식은 예나 지금이나 현장 감식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이 항상 상태가 좋지는 않다. 그 탓에 지문에만 의존하던 과학수사 초기에는 지문이 훼손되거나 채취한 지문이 주민등록 데이터베이스(DB)에서 확인이 되지 않으면 사건이 미궁에 빠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최근에는 이런 일이 최소화되고 있다.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을 고도화해 정교한 지문 감식 작업이 가능해졌다. 또 지문의 범위를 넓혀 손바닥 지문(장문), 입술 지문(순문) 등까지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4월 부산에서 발생한 편의점 강도 사건은 현장에 남은 단 하나의 증거인 장문으로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현재 경찰은 장문관리시스템 구축을 추진 중이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국내 DNA 기술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경찰은 과학수사의 전문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올해 말까지 과학수사요원을 특별채용하며 앞으로도 연차적으로 인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사진은 과학수사요원들이 혈흔을 채취하는 모습.

‘DNA 분석 기술’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수사기법이다. 지문이 없어도 현장에 유류된 피, 침, 정액 등 생체증거에서 추출한 13자리의 유전자 정보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개인의 고유 정보로 신원 확인율이 매우 높다. 하지만 국내에 DNA 기법이 도입된 지는 고작 12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계기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용의자인 A 군의 범행 일체를 자백받고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범행 현장에서 채취한 샘플과 A 군의 혈액 샘플을 일본 경찰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야 했다. 당시까지 국내에는 DNA 분석 시스템이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 일본에서 온 DNA 분석 보고서에는 “동일인임을 판별할 수 없다”는 결론이 담겼고 결국 경찰은 용의자의 자백이 있었음에도 A 군을 풀어줘야 했다. 국내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을 일본의 수사 시스템과 장비에 의존해야 하는 우리 경찰의 ‘굴욕’이었다.

이후 1991년 국과수 한면수 박사가, 세계 최초로 DNA 기술을 이용한 신원 확인 기법을 개발한 영국의 알렉 제프리 박사를 통해 DNA 수사시스템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를 통해 1992년 5월 처음으로 의정부에서 발생한 8세 여아 성추행 사건의 범인을 검거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DNA 검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낸 사건이었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국내 DNA 기술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지난 2010년 7월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특정 범죄수감자에 대한 DNA 자료도 채취, 보관할 수 있게 됐다. 미제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셈이다.

▶얼굴 없는 범인, ‘걸음걸이’로 잡는다…진화하는 한국의 과학수사=한국 과학수사의 격변기가 시작된 2000년대 초중반부터 빠른 속도로 영역을 넓혀간다. 미세증거와 혈흔형태분석 등 기존에 없었던 전문기법 등이 도입되면서다.

미세증거는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법과학의 제1원칙에 가장 근접한 수사 방식이다. 미세증거는 섬유, 페인트, 유리, 먼지 등 범죄현장 또는 사건 관계자의 신체에 남은 작은 증거를 의미한다. 지문과 DNA가 현장에 남아있지 않는 경우 위력을 발휘한다.

‘혈흔 형태 분석’도 2005년에 국내에 처음 도입된 기법으로 출발이 늦었지만 비약적인 발전 속도를 보이고 있다. 핏방울의 위치, 크기, 모양 등을 물리적으로 관찰해 사건 발생을 순서대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법정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는 경우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4월 대전 동부 판암동 살인사건도 혈흔형태분석이 유죄 판결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걸음걸이 분석(gait analysis)’ 기법은 최근 각광받고 있는 새로운 수사기법이다. CC TV에 촬영된 인물과 용의자 간의 걸음걸이 특징을 비교ㆍ분석해 용의자 특정의 정확도를 높이는 기법이다. CC TV에 얼굴이 촬영되지 않거나 화면 상태가 좋지 않아 얼굴 식별이 어려울 경우 유용하게 쓰인다. 지난 5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집에 화염병을 던진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도 걸음걸이 분석에 발목을 잡혔다.

경찰은 과학수사의 전문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올해 말까지 과학수사요원을 특별채용하며 앞으로도 연차적으로 인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범죄가 지능화되면서 최일선에서 증거를 찾아내는 과학수사요원의 역할과 책임도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내부적으로 높은 수준의 실무 교육을 하는 것은 물론 외부 전문가들과 연계해 과학수사 기법 발전을 위한 자발적 연구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sjp10@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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