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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칼럼 - 박영서> 보이보와 보시라이, 父子의 인생유전
재판장이 무기징역 판결문을 낭독하는 동안 보시라이는 미소를 지었다. ‘비리 정치인’이란 오명을 쓰고 몰락했지만 오히려 당과 권력에 정면도전한 자신을 아버지와 비교하면서‘ 실낱같은 부활’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22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서기는 최근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옥중 명예회복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보시라이는 편지에서 “내 아버지는 여러 번 투옥됐으며 나도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를 것이다”며 굳은 의지를 표시했다. 그는 “더 큰 불행도 참아내며 내 명예가 회복될 날을 감옥에서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어머니의 사진을 침대 곁에 두고 있어 더는 외롭지 않다”고 적었다.

보시라이의 아버지는 지난 2007년 99세로 사망한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다. 17세 때 공산당에 가입한 보이보는 베이징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의 길로 뛰어들었다. 1931년 그는 다른 60명의 공산당원과 함께 체포되어 8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된다. 1935년 전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보이보 등 12명에게 사형이 결정됐지만 국민당 정부가 이를 집행하지 않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화북지역을 관할하던 공산당 북방국(北方局) 책임자 류샤오치(劉少奇)는 옥중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궁리 끝에 옌안(延安)에 있던 당 중앙의 승인을 받아 이들이 허위 전향서를 쓰도록 공작을 벌였다. 결국 보이보를 비롯한 61명은 1936년 허위 전향서를 쓴 후 석방된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은 5년여에 걸쳐 옥중투쟁을 한 보이보를 칭송했다. 1949년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보이보는 재정부장 등을 거쳐 국무원 부총리까지 오르는 출세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1966년 말 ‘숙청왕’ 캉성(康生)의 독수(毒手)에 걸려든다. 국가주석 류샤오치를 제거하기 위해 우선 캉성은 30년 전 보이보의 출옥을 꼬투리 잡았다. 이른바 ‘61인 반역자집단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다음해인 1967년 설날 홍위병들은 광저우(廣州)에서 요양 중이었던 그를 베이징으로 데려갔다. 그해 3월 보이보는 ‘류샤오치 반당그룹의 주요 분자’로 낙인찍혀 옥살이를 하게 된다. 보이보는 12년의 영어생활 중 8년을 독방에서 보냈다. 그는 70세 가까운 노인이었지만 다른 혁명동지들처럼 자살을 택하지 않고 온갖 모욕과 고통을 이겨냈다.

보시라이는 그의 막내아들이다. 문혁 초기 홍위병 생활을 하기도 했던 보시라이는 아버지의 실각에 따라 불행의 세월을 겪게 된다. 그는 연좌제에 걸려 5년 가까이 투옥 등 자유를 박탈당했고 노동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문혁이 끝나 베이징대 역사학과에 입학한 것은 1978년 2월, 이미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그해 말 복권된 아버지는 화려한 부활의 길을 걸었다. 공산당 ‘8대 원로’로 불리면서 덩샤오핑(鄧小平) 말년 10년간 원로정치를 주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재판장이 무기징역 판결문을 낭독하는 동안 수갑을 찬 보시라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는 분명히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비리 정치인’이란 오명을 쓰고 몰락했지만 오히려 당과 권력에 정면도전한 자신을 아버지와 비교하면서 ‘실낱같은 부활’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하늘에 있는 아버지가 이 같은 아들의 ‘도박’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py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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