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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부고속道 · 지하철1호선의 마에스트로
1회 기술사자격시험의 산증인 김명년 前한국기술사회장…그의 49년 기술사 인생 대한민국 ‘산업화의 대동맥’을 말하다
“국가인증 기술사 없어 차관 어렵다” 朴 前대통령 지시로 부랴부랴 만든 첫 기술사 시험…현장경험 덕분에 어렵사리 합격

광부·간호사 獨파견으로 빌려온 4000만弗로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건설…노선 선정 반장으로 뛰며 대역사에 내 이름 걸어

서울시 건설국장으로 피땀흘려 완성시킨 서울지하철 1호선…축제의 날 됐어야 할 준공식에 영부인 피살 비보 아픈 기억

이병철 회장 부름받고 삼성行 현재의 삼성엔지니어링 기틀 마련…엔지니어로 평생 현장서 살다 은퇴했지만 흙먼지 냄새 아직도 그리워…


그의 손이 떨렸다. 나이 때문이기도 했다. 1932년생, 올해로 82세인 김명년 기술사. 그는 대한민국 1회 기술사 출신이다.

그래도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또렷한 기억으로 대한민국 1회 기술사 출신으로서 지난 49년간의 스토리를 읊었다. 그는 ‘기술 코리아’ 최고의 스토리텔러로 부족함이 없었다.

대학(서울대 토목공학과) 4학년 때인 1956년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한 그는 이후 철도청에 들어갔다. 철도청 재직 중 김 기술사는 1964년 제1회 기술사 자격시험에 도전, 토목시공기술사와 철도기술사 자격을 따냈다. 당시 32세, 최연소 합격생이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의 노선을 직접 그렸고,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까지 도맡아 했다.

이후 서울특별시 제2부시장, 삼성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서울지하철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최근 서울 압구정동 김 기술사의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김 기술사가 천도복숭아와 사과로 수북한 접시와 커피를 내왔다. 급하게 인터뷰를 하려는 기자에게 김 기술사는 포크로 복숭아와 사과를 찔러 자꾸 건넸다.

“일단 드셔. 드시고 해도 돼.”

김 기술사의 49년 전 스토리가 복숭아처럼 풍성하게, 사과처럼 상큼하게 들려왔다.

지난 1964년 제1회 기술사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한 김명년(82) 씨. 그로부터 49년이 흘렀다. 이후 김 기술사는 서울지하철 1호선, 경부고속도로 등을 건설해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기술보국’, 그는 엔지니어로 평생을 살았던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대한민국 ‘기술사’, 그는 최연소 기술사였다=1964년 말 첫 시험을 본 김 기술사.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인증을 받은 고급 기술자가 국내에 한 명도 없어 외국에서 돈을 빌리기 어렵다”고 말하며 기술사 자격시험을 만들었다.

워낙 아무것도 없던 때라, 기술사 시험 역시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베끼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시험은 더욱 어려웠고, 시험에 붙여서 기술사를 배출하는 게 아니라 시험에 떨어뜨리는 게 주목적인 듯했다고 김 기술사는 회고했다.

그는 “구두시험에 들어갔는데, 심사위원들이 응시생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질문들을 쏟아냈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당당히 제1회 기술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때 시작된 기술사 시험이 올해 100회째 치러졌다. 지난달 23일 합격자 366명이 발표됐다. 지난 1964년 김 기술사가 합격한 이후 지금까지 기술사에 합격한 이들은 모두 4만3623명이다. 이 중 2.4%가 여성 기술사다.

▶1968년 2월 1일 착공, 1970년 7월 7일 준공 ‘경부고속도로’=제1회 기술사가 된 지 3년 후 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뛰어들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하고 있었지만 적임자가 없었고, 이후 김 기술사가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독일을 방문해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했고, 그 대가로 4000만달러를 빌려왔다. 이 자금으로 독일 아우토반과 비슷한 도로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래서 경부고속도로가 기획됐다.

김 기술사는 당시 노선 선정 반장 역할을 하며 1:5만 지적도에 노선을 그리고, 각종 공사비를 산정했다.

김 기술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공사비가 380억원 투입될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 집행된 것은 420억원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가급적 국산 시멘트나 철근을 써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야 했다.

김 기술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현장에 들렀다”며 “격식 없이 들러 현장 얘기를 많이 들었고, 꼼꼼히 메모를 했으며, 진행 상황을 도면을 통해 확인했다”고 전했다.

김 기술사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현장을 찾아 막걸리를 마시며 현장 근무자들과 격식 없이 소통하려 했다고 한다.

김 기술사는 “내가 설계한 것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설계 구간을 점검했다”고 말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1시 준공식 1시간 전=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완료된 후 김 기술사는 서울시 건설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늘어나는 서울 인구를 서울 외곽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정부에서 계획한 지하철 건설 계획에 호출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김 기술사는 1970년 6월부터 지하철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4년여 동안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서울대도서관에서 구한 ‘동경지하철도사’라는 일본 서적이 김 기술사에게는 지하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자, 지침서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74년 8월 15일 오전 11시. 김 기술사는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이날은 서울지하철 1호선 준공식이 있는 날이었다. 1971년 4월 12일 착공식 때는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도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이후 시간만 나면 지하철 공사 현장에 들렀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광복절 행사를 마친 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서울 청량리역사로 자리를 옮겨 준공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탕~탕~탕~!” 광복 29년 기념식이 열렸던 서울 국립극장 강당에 총탄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육영수 여사가 쓰러졌다. 준공식은 대통령 부부가 참석하지 못한 채 행해져야 했다.

웃고 즐기고 축하해야 할 준공식 자리였지만, 국상(國喪)이었다. 그도, 현장에 있던 근로자도 함께 참 많이 울었다고 김 기술사는 회고한다.

김 기술사는 “당시 서울은 계속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이 부재했다”며 “2만5000V 고압과 1500V를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직교 양용 전동차를 고안해 서울과 인천, 의정부를 연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 기술로 만든 지하철이 지금까지도 운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감개무량하다”고 덧붙였다.

지난 1973년 김명년(가운데 안전모 쓴 사람) 기술사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에게 서울지하철 1호선 공사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지하철 건설 후=김 기술사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후 전국 철도망을 기획했다. 기획은 물론 설계까지도 어렵게 해낼 수 있었다. 서울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김 기술사는 강남 개발에 신경을 썼다.

당시만 해도 서울 4대문 안쪽만 도시화돼 있었고, 그 외곽은 무허가 건물들이 즐비했다.

소위 길거리에 대소변이 깔려 있을 정도였다. 4대문 외곽은 무연탄재로 뒤덮여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활하수와 오물하수가 도로에 넘쳐나기도 했다.

당시를 회고하며 김 기술사는 “공무원들의 주요 일 중 하나가 바로 고지대 무허가 주택에 물을 공급해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마이카(My Car) 시대’를 대비해 도시 계획을 정비했고, 한강에 제방을 쌓아 새로 정비하기도 했다. 홍수를 대비해 펌프시설과 유수지를 만드는 것도 김 기술사가 서울시에 근무하면서 기획하고 건설했던 시설물들이었다.

이후 김 기술사는 전두환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와의 인연을 끊었다.

▶삼성맨으로 새로운 도전=김 기술사는 서울시 제2부시장을 끝으로 정부 일은 하지 않았다. 당시 이병철 삼성 회장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김 기술사는 1981년 이병철 회장비서실로 자리를 옮겼고, 삼성이 신흥건설을 받아 세운 삼성종합건설을 맡았다. 이후 800명에 800억원 매출을 올렸던 삼성종합건설을 직원 3000명에 매출 3000억원은 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삼성종합건설의 토대를 닦아 현재의 삼성엔지니어링 기반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현재는 사라진 조흥은행에서 8개월 정도 일하며 삼호라는 주택 건설업체를 맡기도 했다.

▶자리를 떠나면 항상 그립다=기자를 만나기 하루 전, 김 기술사는 손수 A4용지 4장에 빼곡히 ‘1970년대 한강변 경제기적의 기반을… 이를 위해 하나 된 구슬땀, 그때 그분들이 그립다’는 글을 썼다. 그리고 기자에게 복사본을 건네줬다. 김 기술사는 “엔지니어가 돼 평생을 몸바쳐 일한 게 자랑스럽다”며 “그래도 자리라는 게 떠나면 아쉽지 않느냐”고 했다.

가족도, 가정도 없이 일에 빠져 있던 그였기에 과거 선배들의 노력을 잊은 듯한 후배들에게 아쉬움도 내비쳤다.

김 기술사는 자신이 직접 쓴 글에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을 일군, 많은 선배가 잊혀지고 있어 아쉽다”며 “30년간에 이룩한 한강 경제의 기적은 하나 된 선배들의 구슬땀이 만들어놓은 상징물”이라고 되뇌었다.

허연회 기자/okidoki@heraldcorp.com


김명년이 걸어온 길…

▶1932년 경북 안동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업

▶철도청 입사

▶서울시 제2부시장

▶삼성엔지니어링 사장

▶서울지하철공사 사장

▶자민련 강남갑지구당 위원장

▶한국기술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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