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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정이품송--조선 최악 원수집안의 ‘핏빛 사랑’, 공주와 그 남자

 [헤럴드경제=보은] 남장한 두 여인이 더 이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자 큰 소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한양에서 몰래 눈을 피해 험한 길을 걸어온지 벌써 열흘이 넘었으니 연약한 발은 부을 대로 부었다.

때마침 잘 생긴 젊은 나무꾼이 다가와 지게를 내리고 쉬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남녀,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린 건 나무꾼이었다.

“어디를 가시는 나그네신지요? 아주 피곤해 보이십니다” 하며 두 여인을 번갈아 살핀다. 남장한 여인네는 말이 없다.

나무꾼은 차림새를 보아하니 남자인데, 용모가 여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날도 저물고 여기서 다른 마을까지는 한참을 가야 하니 우리집에 가시는게 어떠하신지요?” 라며 반응을 살폈다.

두 여인은 17~18세 가량의 이 총각 나무꾼이 예의 바르고 공손해 믿음이 간데다 지친 몸을 생각해 뒤를 따랐다. 이른 곳은 산 속 바위 밑 움막, 총각 혼자 사는 집이었다. 겁도 났지만 워낙 성실하고 다정한 청년이 저녁밥까지 지어주니 지친 몸 하룻밤 신세 지기로 했다.

정이품송.

이튿날 젊은 여인이 병이 났다. 눌러앉아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는 사이 이들이 여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이 든 여인이 총각에게 말했다. “우리는 한양 대갓집 아녀자들이온데 큰 화를 당해 숨어들어온 길이니 부디 숨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라며 호소했다.

이 말을 들은 총각도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도 화를 피해 홀로 이곳으로 숨어와 살고 있다며 같은 처지이니 함께 지내자고 했다.

한솥밥을 먹고 한 방에서 지내기를 여러 날, 젊은 남녀 사이 ‘이성의 벽’도 눈 녹듯 허물어졌다. 날을 잡아 냉수 한 사발에 성례를 올리니 드디어 부부가 됐다. 그리고 나무꾼이 물었다. “이제 한 몸이 되었는데 숨길게 무엇이 있겠소. 부인은 대체 어느 집 따님이시오”

젊은 부인이 “저는 아바마마의 사약을 피해 궁궐에서 몰래 빠져나온 공주입니다” 라고 답하자 신랑이 벌떡 일어나 공주에게 절하고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귀인인 줄 짐작했아오나 어떻게 이런 일이…저는 절재 김종서 대감의 둘째 손자이옵니다. 가족이 멸족당할 때 하인의 도움으로 도망쳐 이곳으로 숨어들어 왔습니다”

조선 최악의 원수 집안 자식 끼리 맺은 ‘핏빛 사랑’의 결혼이다.

1453년 단종 즉위 1년 그의 삼촌 수양대군은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와가족들을 무참히 죽였다. 수양대군의 형인 문종이 아들 단종의 뒤를 돌봐달라고 김종서에게 유탁했으니 왕좌를 넘보던 수양은 그를 제거해야만 했다. 그리고 조정대신들도 일거에 살육했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수양대군은 그것도 모자라 동생 금성대군과 단종을 유배보낸 후 사사시켜 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 제7대 임금 세조로 등극했다.

이를 지켜본 수양대군의 딸이 아버지께 작심하고 항의했다.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영리해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공주는 사촌오빠 단종을 몰아내 죽이는 아버지에게 “부왕마마, 어찌 어린 상왕과 어진 신하들을 죽이시나이까. 후세 사람들이 아바마마를 어떻게 평하시겠습니까” 하고 통곡했다.

세조는 크게 노하며 “참으로 괴이한 계집애로구나. 당장 끌어내 사약을 내리도록 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꼼짝없이 죽게된 공주, 왕비 윤씨는 매달려 애원했지만 통할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금은 보석을 한 보자기 싸서 유모에게 안기며 둘을 남장시켜 궁궐 밖 멀리 도망가게 했다.

두 여인이 걸어 걸어 내려온 곳이 충북 보은 땅 속리산 입구다. 불어터진 발, 쉬어가노라 큰 소나무 아래 앉았고 이것이 운명의 만남이 되다니.

동행한 안신길 이사와 현지에서 만난 김예응 선생님, 유재관 선생님(왼쪽부터).

부부가 된 나무꾼과 공주, 서로 신분을 확인한 후 모두가 깜짝 놀랐다. 무참히 도륙낸 왕의 딸, 죽임을 당한 김종서의 손자가 한 가정을 이룰 줄이야. 원수 집안 끼리 맺어진 신랑신부, 하지만 이들은 마냥 정답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을 낳아 잘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에게 눈 앞이 캄캄해질 일이 벌어졌다. 세조 10년(1464), 늘 피부병에 시달리던 세조가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 치료하던 차 속리산으로 향했다. 세조는 속리산 문장대 아래에 있는 복천사(현 복천암)의 신미대사를 만나러 행차했다.

한양에서 임금님이 행차한다는 소식에 온동네 사람들이 구경 나왔다. 공주는 대 여섯살 된 아이들에게 일체 밖에 나가면 안된다고 단단히 일렀다. 말을 들을 아이들이 아니었다. 임금님이 큰 소나무 마을에 다다랐을 때 온동네 사람들이 길가에 줄지어 섰다. 왕이 어가(御駕)를 멈춰 세웠다. 그런데 앞의 여자아이 하나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사약을 받고 죽은 딸과 너무나 닮은 모습에 신하를 시켜 집을 탐문케 하고는 복천사로 향했다.

다음날 평복을 한 세조는 신하 둘만 데리고 아이의 집에 들러 물 한 모금을 청했다. 문틈으로 아바마마를 확인한 공주는 뒤뜰 가마에서 숯을 굽던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뒷문을 통해 산으로 달아났다. 인기척이 있었는데 반응이 없자 신하가 집을 뒤지니 뒷문이 열린 채 빈 집이었다. 역적의 가족으로 판단한 신하가 급히 군사들을 풀어 마을에 진(陣)을 쳤다. 이 마을이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진터’마을이고 그 계곡이 ‘가마골’이다.

세조는 자신의 딸이 죽지않고 여기에 숨어 살았음을 직감했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천륜을 저버릴 수 없어 군사들을 철수시켰다.

1935년 정이품송은 도로가 나무 아래로 나 있고 차가 지나가고 있다(왼쪽). 1980년대 정이품송은 수세가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특유의 원뿔형 모습은 살아있다(가운데). 2009년 정이품송은 서쪽 가지가 잘려나간 모습이다(오른쪽)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큰 의문점이 생긴다.

세조에게는 4남1녀가 있었다. 세조는 3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후궁과 후사가 많지 않다. 정희왕후 윤씨와의 사이에 2남1녀 즉 의경세자와 8대 예종이 된 해양대군 그리고 의숙공주를 두었고 근빈 박씨와의 사이에서 덕원군과 창원군 2남을 뒀다.

하지만 이 유일한 공주 의숙(懿淑)은 정인지의 맏아들 현조(縣祖)와 결혼해 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찌된 일일까. 진터, 가마골에 살았다는 공주는 존재하지도 않은 가공의 인물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진터, 가마골 이야기는 둘 중 하나가 된다.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실제로 세조의 또 다른 딸이 궁궐에서 쫓겨나면서 세조가 ‘호적에서 파버린’ 비운의 딸이었을 수도 있다. 세조의 성격에, 조카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딸의 반기에 모욕감과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터이고 보면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래서 왕실 족보 ‘선원록’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공주가 야사에는 ‘세희공주’로 등장, 보은에서 김종서의 손자와 부부가 돼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공주가 터무니 없이 이곳 속리산에 나타났을 리는 만무하다고 보면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조선 후기 문인 서유영(徐有英)이 고종 10년(1873)에 쓴 금계필담(錦溪筆談)에도 이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김종서의 손자가 아닌 셋째 아들 김승유가 공주와 살았다고도 한다. 김승유는 순천김씨 멸문지화 속에서도 살아남아 대동보에도 올라있는 이름이다. 보은군지에는 김종서의 둘째 손자로 기록되고 있다. 계유정난 때 김종서가 70대 초반, 세조가 40대 초반이고 보면 손자로 보는게 순리에 맞을 듯 하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또 나온다.

공주 부부가 뒷산으로 도망갔다면 그 너머편은 경북 상주 땅이다. 이 상주시 화북면 백악산 바위 보굴암에도 똑 같은 전설을 갖고 있다. 상주시에서도 이 이야기를 매우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상주시 주민인 곽희상 선생님은 이 보굴암에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아들(이곳에서 ‘아들’로 구전)이 이 바위굴에 거처를 마련해 숨어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했다. 이들이 속리산을 넘어 상주 땅에 피해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족보에서 빠진 공주가 실제 존재했다는 알리바이가 성립이 되는 귀중한 이야기가 된다.

핏빛 튕긴 원수 집안이 이렇게 섞였다. 그리고 그 큰 소나무가 이들을 하나로 연결시켜줬다. 이 큰 소나무에 사연이 또 많다.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 행차 때 타고가던 가마가 늘어진 이 나뭇가지에 걸리려 하자 세조가 소리쳤다. “연(輦) 걸린다”

순간 나무는 신통하게도 가지를 번쩍 들어올려 가마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임금도 신하도 모두 고개를 갸우뚱 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퍼부었다. 세조는 우산 처럼 생긴 이 소나무 아래서 잠시 비를 피했다. 그리고 갈 때와 돌아올 때 두 차례나 은혜를 입자 이 소나무가 영험한 나무라고 느낀 세조는 ‘정2품’의 벼슬을 내렸다. 요즘으로 치면 장관(長官)이다.

'정2품' 벼슬을 받았다. 장관님이시다.

그 때부터 주민들은 그 큰 소나무를 ‘연걸이 소나무’ 또는 줄여서 ‘연송(輦松)이라고 부른다. 물론 ‘정이품송’이라고도 부르지만 정이품송이 ‘호적상 이름’이라면 연송ㆍ연걸이소나무는 ‘집에서 다정하게 부르는 이름’ 격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0년 2월 27일에는 “거가가 보은현 동평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車駕經報恩縣東平, 夕次于屛風松。 僧信未來謁, 獻餠百五十盆, 分賜扈從軍士)” 라는 기록이 나온다.

임금으로부터 직접 벼슬을 품계받고 보은 고을의 ‘영원한 장관님’으로 이 자리를 지켜와 주민들로부터 사랑받아온 정이품송은 600~800살쯤으로 추정된다. 직접 가서 보니 많이 늙어 있었다. 모진 비바람에 팔도 잃고 속도 많이 상해 있었다. 외과적 수술 흔적과 모든 팔다리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멋진 사진으로만 보던 ‘그림’ 같은 모습을 떠올리면 실망스럽다. 필자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수 백년을 살았지만 아마 정이품송도 송생무상(松生無常)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600년을 살면서 볼 것 못볼 것 다 보아왔다. 가슴 속에 묻어둔 그 이야기들을 더 잊혀지기 전에 필자에게 모두 전해주고 싶어하는 듯 했다. 누군가는 들어줘야 했다.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 즉 서쪽 팔을 잃었다.

정이품송은 지난 1993년 돌풍으로 가지가 꺾여 나간데 이어 2004년 역시 폭설로 또 한번 잘려 나갔다. 공교롭게도 두 번 다 서쪽 가지가 화를 입었다. 그래서 지금 북쪽과 남쪽에 서서 보면 서쪽은 가지가없다. 동쪽에서 바라보면 그 나마 우산 같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는데 조금만 더 늦었으면 오늘날 못 볼 나무가 됐을지도 모른다. 거의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던 그 이전에는 아이들이 놀며 불도 지폈다고 한다. 큰일 날 뻔 했다.

예전에는 나무 바로 아래에 길이 있어서 나무에 해가 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조금 떨어져 도로를 새로 냈지만 필자 마음 같아선 더 멀리 돌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가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정이품송 옆에는 작은 소나무 하나, 친자목(親子木)이 자라고 있다. 20년 안팎 됐다.

친자목.

필자가 찾아간 날 현장에서 만난 보은군의 유재관, 김예응 선생님은 정이품송에 대해 많은 자랑을 하며 보은 주민들에게는 큰 자부심을 안겨주고 있다고 했다.

스쳐 지나가면 ‘나무 하나’만 보였을 것을, 천천히 걷다보니 ‘이야기’가 들린다. 필자에게 여행이란 바로 이런 맛이다.
……………………………
■ 정이품송의 부인 정부인 소나무 : 정이품송과 부부 사이라고 하는 암소나무가 또 있다. ‘정부인송’이라고 불린다.

정이품송은 외줄기로 곧게 자란 모습이어서 남성, 정부인송은 두 줄기로 넓게 퍼진 아름다운 모습이 여성으로 비유됐다. 

정이품송의 아내 '정부인송'이다.

장안면 서원리에 있어 서원리 소나무라고도 한다. 수령 역시 600년으로 추정된다. 역시 천연기념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이 소나무에게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02년에는 정이품송의 꽃가루로 가루받이를 하는 혼례식을 치러 후계목을 길러내는 사업도 시도했다.

■ 주변 명소와 보은 먹을거리 : 정이품송 바로 옆에는 1600평 규모의 연꽃단지가 조성돼 있어 꽃 필 무렵엔 또 하나의 명소가 되고 있다.

속리산 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속리산 대찰 법주사와 복천암이 있다. 그 정상엔 속리산 문장대다.

대추의 고장 보은에서는 대추를 이용한 한정식과 순대가 주요 맛집을 형성하고 있다. 순대는 읍내에 있는 김천식당이 제법 알려져 있다. 필자의 입맛에도 맞았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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