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한석희 기자]“그래도 가볍게라도 술 한잔 해야죠”→ “술은 무슨...그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이번엔 절대 안돼 안돼...“
중국에서 술 한잔 하자는 기자의 농에 청와대 관계자는 절레 절레 고개를 흔듭니다. 때로는 웃자고 스무개 문답이 오갈 때도 있습니다. “정보보고가 올라가겠죠. 그러면 민정에서 부르겠지. 기자와 술 마셨습니까. 예. 업무시간에 마셨습니까. 업무 끝나고 마셨는데요...“ 그리고 개그 프로그램 오성과 한음에서나 볼 법한 허무하지만 속살을 에이는 듯한 문답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이 몇 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한동안 잊혀졌던 ‘윤창중’이라는 유령이 다시 청와대 주변을 감싸고 있습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으로 호된 곤혹을 치룬 청와대로선 이번 방중 순방 기간 제1 원칙을 ‘술조심 또 여성 조심’으로 세운 눈치입니다.
이번 순방 기간 청와대는 공공연하게 ‘노(No) 알코올’을 선언했습니다. 순방이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청와대 관계자들의 입에선 “이번 순방에는 술 없습니다”라는 말이 떠올려지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자들도 ‘더치 플레이’를 해야 할 참입니다. 예전엔 순방 기간 현지에서 청와대 관계자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곧잘 마련되곤 했습니다. 청와대는 사안별로 배경설명을 하기도 하고, 기자들은 뒷얘기 취재도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없다고 합니다. 식당만 하나 예약해 놓고, 각자들 알아서 밥먹고 계산하라고 합니다. 술을 찾을 수 있는 자리를 원천적으로 없애겠다는 거죠. 그 만큼 대통령 순방 중 ‘술’에 대한 알레르기가 심하게 박혔다는 겁니다.술에 대한 청와대의 알레르기는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윤씨 사건이 터진 후 얼마 뒤 청와대 비서관들은 점심시간 1시 30분을 맞추기 위해 헐레벌떡 위민관(청와대 비서동)으로 뛰어갔습니다. 점심시간 반주(飯酒)는 말할 것도 없고 점심시간을 단 1분이라도 넘겨서는 안됐기 때문입니다. 윤씨 사건이 터진 뒤 두 달여가 흐른 지금도 일부 비서실에선 여전히 이런 모습이 목격되곤 합니다.
박 대통령의 중국 순방 중 현지에서 수행원들의 손발이 되어 줄 인턴도 대부분 남자로 바뀐다고 합니다. 밀착해서 수행하는 인턴에는 아예 여성을 배제했다고도 합니다.
윤씨 트라우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번 방중 수행단에 공직기강비서관실도 포함되느냐의 기자들의 질문에 청와대 한 관계자는 “우리가 사고치지 않을께요”라고 씁쓸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은 셈입니다.
물론 이번 순방 중 수행원 명단에는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들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고 윤씨 사건 때문에 이번에 처음 생긴 것도 아닙니다. 사실 예전에도 대통령의 외국 순방에는 혹여 있을지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공직기강비서관실 소속 행정관들이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윤씨 사건 이후 외부에서 바라보는 ‘눈’이 곤혹스러워 말을 못할 뿐입니다.
정부 한 관계자는 최근 사석에서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몰라도 이번 순방 기간 동안엔 다들 꼼짝하지 못할거예요. 국정원이나 현지에 나가 있는 기관들이 불을 켜고 감시할텐데 뭘 하겠어요.” 그래서 일각에선 청와대판 ‘해외 순방 5호 감시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 소리도 들립니다.
그런데 걱정이 하나 앞섭니다. 중국에선 ’술‘이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만찬장에 어떤 술을 내놓느냐가 상대국에 대한 친밀도를 나타내는 징표로 읽히기도 합니다. 술을 권했는데 마시지 않는 것도 대단한 결례입니다.
“저희가 지금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황이어서...” 설마 이런 말을 내뱉지는 않겠죠. 그러고 보니 얼마전 탕자쉬안 중국 전 국무위원이 박 대통령을 접견할 당시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이 “약간 덥습니다. 저희가 에너지 절약 때문에 에어컨을 안틀어서...”라고 했던 말이 떠올려지네요.
그건 그렇고 성과에 대한 중압감도 상당하는 후문입니다. 얼마전 청와대 한 관계자는 “성과를 내야 한다고 하는데...죽을 지경이예요” 라며 하소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미국 순방 기간 한미동맹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대통령이 미국 상하원 합동의회에서 연설을 하고 성과가 좋았는데 하루 아침에 윤씨가 ‘말아 먹었으니‘ 이번에 만큼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한 것도 당연지사겠죠. “이번에 중국을 따라가지 않는게 얼마나 다행인데요. 수행원들은 이번에 죽었다고 봐야죠.” 최근 저녁 술자리에서 청와대 한 관계자의 하소연이 지금도 귓가를 맴돕니다. 그저 이번 대통령의 중국 순방 뒤에는 “백서를 만들어야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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